
인식은 여전히 '보조자'
몸도 마음도 고달픈 1인5역 삶
여성감성 부각 세계적 트렌드
농업도 영역 확대 역할 커져
정부의 질높은 육성정책 급해
"아내의 수건 벗은 새벽 머리로부터 이 세계는 어두워 온다. 이윽고 그녀가 먼 들길을 건너올 때, 우리나라의 별똥이 그 위에 흐른다. 나는 아무런 뜻도 없도록 아내 소망에 내 소망을 더한다. 아내의 손발이 얼마나 텄을까. 오늘 장에서 신(神) 같은 크리임을 사왔다…" 고은 시인의 시 '내 아내의 농업' 가운데 일부다. 여성농업인들의 고단한 삶이 잘 표현된 시라고 생각한다.
농촌여성의 삶은 고달프다. 젊은 층이 계속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우리 농업과 농촌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 농촌과 농업의 핵심 인력이 여성이고 이들이 농촌사회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한다. 집에서는 며느리요 아내요 어머니로서, 들에서는 일꾼으로, 지역사회에서 때로는 지도자 역할을 해야 하는 농촌 여성들은 몸도 힘들고 마음도 고달프다. 얼마 전 여성 농업지도자의 이취임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임하는 여성지도자를 보면서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바야흐로 여성 시대이다. 여성 대통령이 국가를 이끌고 있고, 섬세함을 비롯한 여성의 장점이 부각되는 시대다. 3월초 일본에서 열린 도쿄식품박람회의 주제는 '여성', '건강', '소포장'이었다. 여성의 감성이나 중요성을 잘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 세계적 트렌드이다. 농업계도 여성이 가진 능력을 잘 활용해야 한다. 농업의 영역이 관광, 체험교육, 가공산업 등으로 확대되면서 여성농업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여성농업인의 특성에 맞는 사업개발, 육아지원, 교육, 의료, 문화 프로그램 등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여성농업인이 희망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여성농업인이 희망을 찾지 못하면 우리 농촌에 미래가 없다. 우리나라 농가인구 중 여성 비율은 53%로서 남성 비율을 능가한다. 일하는 시간도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 우리나라 여성농업인들의 평균 노동시간이 11시간으로 선진국에 비해 3~4시간이나 많다. 밥하고 빨래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 일한다. 손맛가꾸기, 식품가공, 도농교류, 농촌 봉사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농업인의 경제적 지위는 여전히 남성에 비해 낮고 처우도 열악하다. 농촌 여성의 임금 수준은 남성의 65%에 그친다. 정부의 복지정책이 확대되고 있지만 도시 여성들에 비해 복지서비스도 제한되어 있다. 여성인력에 대한 인식도 문제이다. 농업선진국은 농촌여성을 직업종사자로 분류하여 법적 지위를 보장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성인력의 전문성을 인정하기보다는 보조자 정도로 생각한다.
낮은 임금, 인식부족, 열악한 복지여건 등이 여성의 농촌 유입을 기피하게 만들고 농촌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정부에서 여러 가지 대책을 추진중이나 아직까지 미흡하다. 지난 2001년 '여성농업인육성법'을 제정하고 전문 농어업경영역량 강화, 지역개발 리더 및 후계인력 육성, 여성농어업인의 삶의 질 향상 등 여러 가지 대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만족할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다.
최근 화성시에서 열린 생활개선중앙연합회 회장단 이취임식에 다녀왔다. 이날 참석한 많은 여성 농업지도자들은 여성농업인의 권익 향상과 농촌지역 발전을 위한 여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필자는 3년전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농식품기술협력협의체(AFACI)' 회의에 참석했던 필리핀 농업부의 여성 차관을 기억한다. 회의 일주일 전에 남편을 잃었으나, 개인적인 슬픔을 뒤로 한 채 국제회의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많은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던 푸얏 차관이다. 필자에게 한국의 앞선 농업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하던 푸얏 차관이 회의를 마치고 흘리는 눈물을 보았다. 세계 최대의 쌀생산국이었으나 농업투자를 소홀히 한 결과 연간 200만t의 쌀을 수입하게 된 필리핀의 현실이 서글펐을 것이다. 여성 농업인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와 무게를 깊이 새기며 다시는 이들의 눈물을 보지 않기를 바란다.
/김재수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