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은 물론 성인 대표팀까지 통틀어 한국 농구가 중국을 이토록 크게 이긴 경기는 없었다.
대회 MVP를 차지한 방성윤. 그리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정상헌. 이들은 내외곽에서 맹활약하며 '만리장성' 중국을 꺾는데 일조했다. 당시 농구 전문가들은 "허재를 뛰어넘을 재목들"이라며 "한국 농구의 미래는 밝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두 선수는 각각 대학과 프로무대 적응에 실패하며 코트를 떠났다.
그리고 최근 두 '농구천재'는 나란히 살인, 폭행사건에 연루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농구계와 농구팬들은 이들의 날개 없는 추락에 큰 충격에 빠졌다.
정상헌은 경복고 재학 시절 아시아선수권 대회 MVP 방성윤보다 운동신경과 기술에 있어서는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다. 포인트 가드로서 장신인 192cm의 신장에 스피드와 뛰어난 패스 능력을 갖춰 '한국의 매직 존슨'이라 불리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고려대학교 진학 뒤 팀 적응에 실패해 팀 이탈을 거듭했다. 잦은 이탈과 돌출 행동으로 체중은 100kg까지 늘어나는 등 농구 선수로서는 '폐인'과 다름없는 몸으로 전락했다.

고교 졸업 후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방성윤은 라이벌 정상헌이 훈련에서 이탈할 때도 묵묵히 농구공을 만지며 발전을 거듭했다. 그 결과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유일한 대학생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 중국을 꺾고 20년 만에 금메달을 따내는데 일조했다. 이로 인해 그는 군 면제 혜택을 받고 2004년 미국 프로농구 NBA의 하부 리그인 NBDL의 로어노크 대즐에 입단, 3점슛 부문 리그 1위에 오르는 등 탁월한 슛감각을 인정받았다.
2005~2006시즌 한국 무대로 돌아온 방성윤은 신인상을 받았다. 또 그해 개최된 2006 도하아시안게임 카타르 전에서 3점슛을 무려 12방이나 터뜨리며 42점을 몰아넣어 한국 농구의 기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방성윤은 이후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 시달리다 2011년 은퇴했다. 그리고 지난 27일 지인의 동업자를 상습 폭행한 혐의로 고소돼 소환조사를 받았다.방성윤은 지인 이씨와 함께 이씨의 동업자 김모씨를 지난해 4월부터 약 4개월간 상습 폭행한 혐의로 지난해 9월 고소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