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의사 /YTN 방송 캡처
안중근 의사 탄생 135주년에 '안중근 의사 기념비' 철거 소식이 전해져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9월 2일은 안중근 의사 탄생 135주년이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된 안중근 의사 기념비 철거사실이 알려져 씁쓸함을 전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비는 지난 2002년 서울보건식학연구원과 블라디보스토크 주립의과대학이 MOU를 체결하면서 건립됐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 측은 "별 다른 설명 없이 기념비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고,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 새로 취임한 주립의과대학 총장이 기념비의 의미를 잘 모르고 철거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기념비만 세워놨을 뿐, 국가보훈처나 당국의 지속적인 관리가 없었다는 것.  

철거된 안중근 의사 기념비는 한인이주기념관으로 옮겨졌으며, 오는 20일 안중근 의사에 대한 설명이 담긴 표지석과 함께 기념비를 공개할 예정이다. 

한편 안중근 의사는 1987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 안중근 의사 /YTN 방송 캡처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정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198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안중근 의사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으며, 당시 안중근 의사는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해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꾸준히 독립운동가로 나라를 위해 활동한 안중근 의사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안중근 의사는 상해에서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됐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은 안중근 의사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1910년 3월 26일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