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국자들 중산층이하 계층
소득 보전정책 관심 없다
버킷의 구멍이 막혔다면
먼저 대지를 적신후
물을 빨아들일 궁리해야
1980년대 대학가를 점령한 책은 사회과학 서적들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지도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영어를 배운다는 명분으로 한 권쯤 끼고 다니던 매체였다. 영어 정복이라는 목표에는 실패했지만, 그 덕에 선명하게 각인된 기사가 하나 있다.
80년대 초 이 주간지가 커버스토리로 다룬 내용이었다. 당시 대서양 양안(兩岸)은 보수주의 혁명이 한창이었다. 미국에서는 레이거노믹스, 영국에서는 대처리즘이라고 불리는 이 경제 사조는 감세와 규제 완화를 통해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믿었다. 주로 민간이나 정부의 수요를 자극하자던 이전의 사조와 다르다는 점에서, 이는 공급측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70년대 미국과 영국의 경제환경이 이 사조의 탄생 배경이 됐다. 당시 두 나라는 인플레이션과 각종 이해단체의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부는 이런 문제에 적극적인 대응을 못했다. 정부가 문제 해결자가 아니라 문제 그 자체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었다. 이는 시장의 힘과 기업 자율성을 통해 문제를 풀어보자는 아이디어로 발전했다. 과거의 전통적 경제이론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이 경제 사조는 신고전주의(비판자들에게는 신자유주의)로 불리기도 했다.
이 경제 사조의 핵심 논리를 당시 ‘타임’지 커버스토리를 통해 깨우쳤다. 오늘날에는 일상용어가 되다시피 한 낙수(trickle-down) 효과다. 감세와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이나 상위 계층의 형편이 나아지면, 이는 소비를 늘려 필연적으로 중산층과 서민의 혜택으로 이어진다. 구멍이 숭숭 뚫린 버킷에 물을 부으면 대지를 적시게 마련이라는 논리였다.
비록 대학생이었지만 이 논리에 일말의 회의를 품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만일 버킷에 구멍이 제대로 뚫려 있지 않다면? 기업의 효율성이 높아지면서 사람을 더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인다면? 기계와 정보기술(IT)의 발달로 고용 없는 성장이 본격화되면서 이 불길한 예감은 거의 전 세계적인 현실이 됐다. 기업 이익 증가가 일자리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낙수 효과는 대부분 사라지고 있다.
어떤 종류의 경제 사조든 처음 등장했을 때는 신선한 산들바람처럼 느껴진다. 당시 처한 경제환경에서 필요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극하는 면이 있다. 문제는 시간이 흘러 이 사조가 정책과 권력, 이념과 결합했을 때다. 이때 사조는 경제환경과 무관하게 교조화되고 최악의 형태로 둔갑해 버린다. 시장의 힘과 기업의 자율성을 옹호하던 보수주의 혁명 역시 일방적 시장 만능주의와 상류층 이해 옹호론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것도 35년의 세월을 거스르고 태평양을 건너 우리 땅에 가장 교조적 형태로 수입됐다. 현 정부나 여당은 경기 활성화에 대한 압력에 직면해, 미국이나 일본이 그간 써온 유동성 공급이나 임금 인상 등의 정책을 답습해 오고 있다. 하지만 재정여력이나 경제형편을 고려했을 때 절실한 기업 법인세 인상이나 부자 증세는 절대 안 된다고 고집하고 있다. 경제정책이 이념이나 정치 공약의 함정에 묶여 버린 셈이다.
레이거노믹스와 낙수효과를 설명하던 커버스토리에 대한 독자의 반박이 다음 호에 실렸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흡인(ooze-up) 효과라는 신조어까지 곁들인 어느 경제 전문가의 반론이었다. 낙수 효과와는 반대로, 먼저 중산층과 서민의 소득을 늘려주면 자연스럽게 기업과 상위 계층에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까? 중산층 이하 계층도 결국은 기업이나 상위층의 제품과 서비스를 소비할 테니까. 실제로 보수주의 혁명의 기치가 가장 높았던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중산층 이하 계층의 소득보전을 위해 소비 쿠폰을 돌린 예들이 있다.
낙수효과가 거의 사라진 요즘도 우리 정책 당국자들은 중산층 이하 계층에 대한 소득보전 정책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식의 복지나 분배 정책에 대해서는 알레르기성 반응마저 보인다. 그렇다면 이름부터 ‘성장을 위한 복지나 분배 정책’으로 바꾸면 어떨까? 버킷의 구멍이 막혔다면, 먼저 대지를 적신 다음 물을 빨아들일 궁리라도 해야 한다.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