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 혜담스님11
지난 5일 수원 당수동에 위치한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에서 혜담스님이 현재 진행 중인 수월관음상을 그리고 있다.

전쟁 많던 시기 참회위해 집에 부처님 모신 듯… 조선초 불교 박해로 자취 감춰
일본이 강점기때 가져다가 국보급 보물로 지정 현존 200여점 중 국내 20여점뿐
아이러니하게 일본인 도움으로 300여점 재현 한국 문화재로 알리려 수십년 노력
정교하고 화려해 고려 전후에 없던 미술사조… 복원 작품이라도 잘 보존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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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빛의 투명한 사라가 부처의 몸을 감싸 안았다. 사라에 정교하게 박힌 금빛 문양이 화려한 빛을 낸다. 가늘게 뜬 긴 눈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그 생경한 모습이 낯설다. 그런데 묘하게 자꾸 시선을 잡아당긴다. 이토록 아름다운 부처를 본 적 있을까.

지난 5일, 수원 당수동에 위치한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에서 고려불화 중 하나인 '수월관음상'을 만났다. 그리고 월제 혜담스님을 만났다. 혜담스님은 이곳의 수월관음상을 그린 작가다. 이곳의 수월 관음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수월관음상을 혜담스님이 재현해 놓은 것이다.

고려불화가 채 20여 점도 남아있지 않은 이 척박한 땅에서 혜담스님은 300여 점이 넘는 고려불화를 재현하는 작업을 40여년간 이어왔다.

수월관음상
맨 위에서부터 수월관음상, 오백나한상, 관경16관변상, 열반상. /계태사 고려화불 학술연구소 제공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938년 즈음부터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물물교환이 성행하면서 불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됐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 불화는 왕족과 귀족 등 상류층이 즐기는 귀족 문화였다. 불화를 그리는 스님이나 화공, 화사를 모셔와 원하는 대로 불화를 그리게 할 만큼 성행했다. 조선 초기까지 500여년 간 고려불화가 이어졌다.

"당시 문헌을 토대로 보면, 워낙 내란·외침이 많아 늘 전쟁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살상이 이루어지다 보니 그 죄를 참회하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집 안에 부처님을 그림으로 모셔두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 수요는 어마어마 했을 거라 추정하구요."

조선 초 세종 때 억불 정책이 시행되면서 불교가 말살되다시피 박해를 받았고 고려불화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절에서조차 불화를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민가의 불화들은 오죽했겠어요. 고려불화 자체가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했던 겁니다." 스님은 그 이후의 역사를 몹시 안타까워 했다.

"일제 시대때 일본인들이 고려불화를 일본으로 많이 가져갔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일본은 불교국가라고도 할 수 없는데, 이것이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문화재로서 지닌 가치를 알아차린 거죠. 그때 당시 일본 문화위원회 같은 정부조직에서 이를 가져다 국보급 보물로 지정한 게 벌써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현존하는 고려불화는 200여 점 정도다. 이 중 180여 점을 일본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려불화는 그나마도 벽화로 그려져 있거나 경서에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젊은 시절 혜담스님은 수월관음상을 책에서 접했다. 그 모습에 매료돼 고려불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고려불화 입장에선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림에 소질이 있는 스님의 눈에 띈 셈이다.

"수월관음상을 보고 큰 매력을 느꼈는데, 관세음보살을 보고는 '아, 내가 불화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리려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자료도 거의 없고 절에는 탱화의 유형만 보존되고 있을 뿐 고려불화에 대해서는 전무했어요."

막막하던 그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 일본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일본 한 박물관의 부관장이던 오야마 노리오 씨가 자료를 보내주었다.

"오야마 노리오씨가 수십년간 고려불화의 사진이나 재현하는 데 필요한 문헌 등 자료를 보내주었어요. 그 사람은 고려불화가 갖는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여겨 저를 도와 불화가 현재에도 재탄생되기를 바란 거죠. "

고려불화의 특징은 매우 정교하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옷 안으로 비치는 부처의 팔뚝과 몸은 고려 불화에서만 볼수 있는 섬세한 표현이다. 순금가루를 안료 삼아 문양을 그려넣었다. 서양 르네상스 시대보다 300여년을 앞서 시작됐지만 훨씬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졌다는 평을 받는다.

"서양 종교화들은 캔버스에 유화로 제작되는데, 고려불화는 비단에 석채(천연안료)로 제작됐고 문양들이 매우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돼 있어요. 아마도 고려시대에는 왕족, 귀족들이 출가를 했을 만큼 불교문화가 융성했기 때문에 고려불화도 화려하게 그려지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려불화의 진가는 해외 미술계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다. 스님은 2014년을 시작으로 3년 연속,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프랑스 국립살롱전에 초청을 받았고 해마다 특별상을 수상했다.

"고려불화는 고려 전후에는 전혀 없었던 미술사조라는 게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어떤 시기에도, 어떤 문화에도 이렇게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불화는 없었어요. 해외에서도 고려불화가 가진 희소성을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그걸 우리만 모르고 있는 게 참 안타깝죠."

고려불화를 다시 우리 곁에 돌려놓기 위해 노력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의 편견이 가장 그를 힘들게 했다.

"해외에 제가 재현한 고려불화를 내놓으면 아주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있습니다. 고려불화 자체가 일본 문화재라고 인식하거든요. 그동안 일본에서 자국의 문화재로 보존하면서 해외에도 열심히 알려왔고. 그런데 제가 나타나 한 30년 동안 미술계 뿐 아니라 국제학술대회에 나가 고려불화가 우리 문화재임을 알렸어요. 일본인들이 절 참 싫어합니다. 그래도 이제야 우리 것이라 인식하는 시선들이 좀 생겼어요. 하지만 국내에선 아직 멀었죠."

인터뷰 공감 혜담스님6

국내는 고려불화를 '문화재'보다 '종교화'로 치부하는 경향이 크다. "고려불화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입니다. 제가 고려불화를 알리기 위해 30년을 떠들었는데도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 어쩌면 좋을까 싶습니다. 세월이 너무 흘러버려서 이제 우리 것이라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도 못 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 맥을 잇기 위해 후계자를 양성해야 하지 않냐고 넌지시 물었다.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배운다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이걸 해서 젊은 사람들이 밥벌이할 수 있을까요. 작업도 일반 미술과 다르게 매우 난해하구요. 이 길을 걷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헤아릴 수 없어요. 젊은 세대에게 내 길을 걸어가라고 권하며 그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님은 그저 복원한 작품이라도 보존되길 바랄 뿐이다.

"제가 고려불화를 그릴 수 있게 도와준 오야마씨가 이런 말을 했어요. '모든 걸 다 뺏긴 이 상황 속에서 스님 혼자 어떻게든 불화의 명맥을 이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한국 정부가 도와주기는 고사하고 스님이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있다. 한국사람들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다' 그 말이 참 아프게 다가왔지만 아직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으니 맞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우리 것을 빼앗아 간 이들에게 듣는 쓴소리에 고개를 숙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아버린 게 아닌가.

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인터뷰 공감 혜담스님10

■혜담스님은?
▲ 1980년~ 고려불화 재현

▲ 1985년~ 대한불교보문종 계태사 주지

▲ 2005년 12월 대통령 표창장 수상

▲ 2009년 3월 수원시 공로상패 수상

▲ 2009년~ 사단법인 계태사 고려화불학술연구소 이사장

▲ 2009년 9월 조계종 중앙신도회(문화재환수위원회) 회장 감사장 수상

▲ 2014년 11월 스리랑카 상카대학교 명예박사학위 취득

▲ 2014~2016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국립 살롱전 초청, 특별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