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홀로 팀 정상으로 이끈 슈퍼맨
'비교 불가' 강속구로 마운드 호령
선, 韓야구 전무후무 '0점대'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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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경남고 2학년 시절이던 1975년,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당대 최강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무려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 행진을 벌이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야구가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처음으로 국제대회를 제패했던 1977년과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올랐던 1978년 이후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된다. 이제 막 대학 1, 2학년이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1982년까지 6년 동안 그는 연세대와 실업팀 롯데에서 늘 팀이 치르는 경기의 절반 이상을 감당하는 마당쇠였고, 그렇게 거의 혼자 힘으로 늘 팀을 정상에 끌어올리는 슈퍼맨이었다.

부상으로 거르다시피 했던 1979년을 제외하면 해마다 대학무대에서 한 번 이상씩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고, 1981년에는 실업리그와 캐나다 대륙간컵대회에서 다시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특히 혼자 6차전까지 모든 경기를 책임지다시피하며 김시진이 이끌던 경리단을 물리치고 롯데의 역전우승을 이끌었던 1981년 실업리그 코리언시리즈는 최동원이라는 이름이 곧 투수, 혹은 야구 자체를 상징하게 만든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야구사를 수놓았던 수많은 별들의 이름 속에서도 최동원의 이름이 각별한 빛을 발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단순한 '당대최고'가 아니라 '당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투수였기 때문이다.

그의 공은 요즘처럼 '공의 위력으로' 배트를 누르며 파울을 양산하는 '강한 공'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의 속구는 그야말로 다른 투수들의 빠른 공과 시속 10㎞ 이상의 차이를 내는 비현실적인 스피드로 상대 타자의 인지능력과 운동능력의 한계를 비웃는 '마구'였던 것이다.

프로무대에서 1984년에 시즌 27승을 올린 데 이어 한국시리즈 4승을 전담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것을 비롯해 4년간 75승을 기록한 뒤 맞이한 1987년, 최동원의 나이는 서른이었지만 이미 신체능력은 절정기를 한참 지나고 있었다.

선동열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80년이었다.

그 해 광주일고 3학년이던 선동열은 봉황기대회에서 경기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더니 황금사자기대회에서는 팀을 결승까지 이끌며 감투상을 받았고, 대통령기대회에서는 팀에 5년만의 전국대회 우승을 안기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한 해 내내 신문지상에 이름을 올려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대에 진학한 1981년에는 세계청소년선수권 창설대회에 참가해 초대 MVP에 선정되며 미국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고, 동년배들에 비해 월등히 빠른 공을 던지는 유망주였고, 해마다 몇 명씩 야구기자들이 선심 쓰듯 붙여주었던 '제 2의 최동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1982년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그는 '제 2의 최동원'이라는 이름을 넘어서게 된다. 선동열은 대학 2학년, 만 19세의 나이로 그 대회 대표로 발탁된 데 이어 컨디션 난조를 보이던 최동원과 김시진을 대신해 미국과 대만, 그리고 사실상 우승을 놓고 맞붙은 일본과의 최종전에 투입됐다.

그리고 그는 그 세 경기를 모두 완투해 3승(평균자책점 1.00)을 기록하며 감격적인 우승을 이끌었고, 결국 대회 MVP에 오르며 새로운 에이스의 탄생을 알렸다.

그렇게 일찌감치 거물로 자리매김한 덕분에 1985년에는 프로와 실업리그가 법정싸움까지 벌이는 대소동 끝에 '전기리그는 근신하는' 조건으로 프로무대를 밟았고, 그 해 시즌의 절반만 뛰면서도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1986년, 선동열은 24승을 기록하며 프로무대 슈퍼에이스의 반열에 합류했다. 더구나 그 해 그는 19번이나 완투하는 등 262.2이닝을 던지는 강행군 속에서도 0.99라는 묘한 숫자를 기록지에 남겼는데, 그것은 한국프로야구사상 전무후무한 '0점대 투수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선동열 역시 최동원에 버금가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무기는 명석한 두뇌와 유연한 몸이었다. 그는 타고 난 유연한 몸에 끊임없이 기름을 치고 조이는 부지런하고 신중한 선수였으며, 항상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투입해 필요한 구종의 공을 뿌려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투수였다.

/김은식 야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