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3]1997년 박철순, 마운드에 입을 맞추다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3]1997년 박철순, 마운드에 입을 맞추다 지면기사

    마취제 맞아가며 OB 우승 이끌어심각한 '후유증'으로 십여 년 고통최고령 승리등 박수받으며 마침표 1997년 4월29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의 OB 홈경기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표가 모두 팔려나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 뒤로 다시 베어스의 평일 홈경기가 매진되는 데는 무려 12년4개월이 걸릴 만큼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오직 그날 통산 76승을 기록했을 뿐인 '그저 그런' 한 노장투수의 은퇴식이 열린다는 이유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파였다. 기록으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박철순이라는 특별한 선수였기 때문이다.배명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1년을 보낼 때까지 체격이 좋고 공이 빠른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그래서 전국무대에서 거둔 성적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박철순이 투수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공군 팀 '성무'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독한 근성의 사나이 이종도와 부대끼며 '드디어 야구를 레크리에이션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당대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던 명투수 남우식에게 과외교습을 받으며 '기술'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대 말년에 출전한 1978년 백호기 결승에서 연세대 최동원과 완투맞대결을 벌여 2-0으로 승리하며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계기로 국가대표로 발탁돼 쿠바전 최초의 승리투수가 되고 다시 미국무대로 진출하는 역사를 만들어가기도 한다.하지만 그가 대중의 기억 속으로 들어온 것은 역시 1982년, 프로야구 원년이었다. 그는 빠른 공을 주무기로 삼는 투수였지만, 간간히 너클볼과 팜볼 같이 생소한 궤적과 속도로 날아가는 신무기를 선보이며 상대 타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 해 팀당 80경기가 치러지는 가운데 그는 22연승을 포함해 24승을 기록했고, 그런 압도적인 활약으로서 팀에 역사적인 첫 우승컵을 안기게 된다.하지만 정작 그의 이름이 야구팬들에게 각별하게 기억된 것은 오히려 그 뒤의 일들 때문이었다. 심각한 허리부상에도 불구하고 국소마취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등판해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후유증이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2]1996년, 괴물신인 박재홍 30-30시대를 열다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2]1996년, 괴물신인 박재홍 30-30시대를 열다 지면기사

    김종국·홍원기 등 '92학번' 주목개막과 함께 장타 '3경기당 1홈런'30호 아치때 이미 32호 도루 달성한국야구의 걸출한 재목들이 가장 많이 태어난 해로 1973년이 꼽힌다. 그 해에 태어난 선수들 중 염종석, 정민철, 안병원 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에 데뷔한 것이 1992년이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던 73년생의 핵심멤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무대에 나타난 것은 1996년이었다. 그 해 야수로서 주목받은 '92학번'들은 박재홍과 김종국, 그리고 홍원기였다. 그 중 박재홍이 4억원대, 김종국과 홍원기가 2억원대의 몸값과 그만큼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프로 데뷔 공식경기인 시범경기 개막전에 선두타자로 나선 첫 타석에서 초구 홈런을 날리며 '또 한 명의 이종범'으로 이름을 알린 해태의 김종국과 시범경기 8할 타율을 기록한 한화의 홍원기였다. 반면 박재홍은 파워와 스피드 어느 면에서도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고, '고비용 저효율'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박재홍은 고교시절에는 시속 140킬로미터 이상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파워와 스피드와 수비력을 겸비한 견실한 내야수였기에 어느 면으로든 쓸모를 찾을 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박재홍은 오직 고향 팀이라는 명분과 1차지명이라는 못마땅한 무기의 힘을 빌려 헐값에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는 프로팀의 의도에 순순히 끌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박재홍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자신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계약조건을 제시받아, 지명을 거부하고 실업팀인 현대 피닉스와 계약을 했다. 그렇게 굴러들어온 복덩이를 잡은 현대는 아직 입단하지도 않은 그에게 최상덕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새로 창단한 프로팀 현대 유니폼을 입히는 수완을 발휘했다. 현대의 창단감독 김재박이 박재홍에게 맡긴 임무는 공격의 첨병이었다. 3루수 자리에는 이미 거구의 3할 타자로 성장한 권준헌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김인호와 김성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1]1995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 (下)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1]1995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 (下) 지면기사

    대학들과 '스카우트 경쟁' 심해져고졸 신인 쏟아져 들어온 프로팀2군 '미래 스타의 산실' 자리잡아병역 문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선수들이 대거 프로 직행을 택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프로직행을 택하는 것은 '소년가장'들이나 하는 일로 여기던 분위기가 있었다. 프로원년, 진흥고와 광주상고를 졸업한 김정수와 장채근이 해태 코치의 꼬임에 넘어가 프로선수가 되겠다고 가출까지 감행했다가 뒤늦게 아버지에게 뒷덜미 잡혀 대학 기숙사에 던져졌던 것은 그런 분위기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비로소 대학과 프로팀이 대등한 위치에서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대학의 문호가 좀 넓어지고 집집마다 살림에 구김살도 좀 펴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반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방위병 출장금지조치가 내려지기 직전이었던 1994년은 프로와 대학의 경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는데, 그 해 고교무대 최고의 타자 김재현과 김동주가 각각 첩보전을 방불케하는 사연 속에 프로와 대학으로 갈라섰던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하지만 '병역과 선수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상, 대학에서 보내야 하는 4년의 세월은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선수들이 갑자기 머리를 누르기 시작한 2,3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4년간의 대학생활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부터 대졸 선수들만을 대상으로 진행해오던 드래프트에 고졸선수들까지 포함시키게 된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또한 방위병 경기출장 금지조치는 그로부터 몇 해 뒤 터져 나오게 되는 대규모 선수 병역비리의 씨앗이 되기도 했고, '합법적 병역 회피수단'인 국제대회 대표 선발과 메달 획득에 대한 열망을 치솟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야구드림팀'의 역사가 시작된 것 역시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좀 더 의미 있는 변화도 있었다. 그렇게 젊은 고졸선수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프로팀 입장에서는 신인 선수들을 '느긋하게 한두 해 가르칠' 시간을 가지게 된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0]1995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0]1995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 지면기사

    퇴근후 평일 저녁·주말 이용 출전 양준혁 시즌절반 소화 홈런왕경쟁'특권' 불편한 시선 10년 관행 사라져1995년 4월 22일, 부산 사직에서 롯데가 삼성을 불러들여 홈경기를 벌이고 있었다. 롯데의 선발투수는 1989년 부산고등학교를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끌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리고 1994년 롯데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해 곧장 7승을 올리며 기대를 모은 2년 차 강상수였다. 시즌 두 번째 등판이었던 강상수는 그날도 3회까지 삼성의 강타선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4회 초가 채 끝나기 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김실과 이정훈을 연속 볼넷으로 내보내기는 했지만 크게 흔들린 것까지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아직 경기 초반이었다. 관중들은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저녁 뉴스를 보면서야 알 수 있었다.그가 갑자기 강판해야 했던 이유는 TV를 통해 경기를 보고 있던 누군가가 경기장으로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강상수는 첫 시즌을 마무리할 즈음 방위병으로 입대한 군인 신분이었고, 주말을 이용해 홈경기에 등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 그 경기를 TV를 통해 보게 된 소속부대 관계자가 경기장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중단'을 요구했던 것이다. 10년 이상 불안하게 이어져 온'방위병의 홈경기 출장'이라는 관행은 그렇게 확실히 깨졌고, 그 이후 한국야구의 물줄기는 크게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했다.1982년, 프로야구위원회 초대 총재였던 서종철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이었고, 무엇보다도 '프로야구의 성공을 위해 각 부서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런 그의 요구를 국방부가 거절할 수 없었고, '복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 방위병의 경기 출장을 허용한다'는 양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위수 지역'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홈경기에만 출장하는 조건이었지만, 퇴근 후의 시간인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만 경기가 열린다는 점에서 '시즌의 절반'은 치를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 첫 수혜자는 1984년에 입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9]1994년, 현대의 제2리그 창단 추진과 '피닉스' (下)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9]1994년, 현대의 제2리그 창단 추진과 '피닉스' (下) 지면기사

    우수선수 확보위해 경쟁 하던 중현대, 1995년 '태평양' 인수 발표피닉스, 결국 현대 선수공급처로현대는 우선 '피닉스'라는 실업야구팀을 창단하기로 했고, 조만간 뜻을 함께하는 다른 기업들을 규합해 제2의 프로야구리그를 출범시키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리고 수십억의 현금가방을 들고 예의 저돌적인 기세로 대학야구팀 숙소를 밤낮으로 누비기 시작했다. 1994년 6월 무렵 이미 그 해의 대졸 빅4로 불리던 문동환, 심재학, 안희봉, 위재영을 비롯한 상위랭커 25명이 모두 현대 쪽과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잘 골라서 지명만 해놓으면 선수들로서는 별 수 없이 입단하게끔 되어있었기에 느긋하기만 했던 8개 프로구단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었다. 10월31일까지는 아마추어 팀 소속의 선수와 계약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던 아마와 프로 사이의 합의는 더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몸이 달아오른 프로팀들은 '현대보다 한 장 더 얹어 주겠다'며 달려들었고, 결국 그렇게 한 개의 아마추어 팀과 여덟 개의 프로팀 사이에 치열한 돈 싸움이 시작되었다. 먼저 7월 들어 태평양이 4년 전부터 매달려온 투수 위재영을 2억 이상의 계약금과 4년 전 대학과 이중계약에 휘말렸을 때 깨끗이 물러나고 기다려준 인정에 호소한 끝에 '구두약속'을 받아냈고, 곧 LG 역시 비슷한 액수와 방식으로 타자 심재학을 잡아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단들은 현대와의 돈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전선이 고졸예정자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김승관(삼성)과 조현(LG) 등이 각각 억대의 기록적인 계약금을 받으며 프로행을 확정했다. 그 무렵 끝내 대학행으로 결론이 난 고졸 최대어 김건덕에게 건네진 제안은 2억이 넘을 정도였다. 프로팀 사장들은 '한 구단이 한 명씩만 책임지고, 배상금을 지불하고라도 선수를 빼옴으로써 현대를 저지하자'고 서로를 독려해가며 전의를 불태웠고, 그만큼 모든 면에서 지난해보다 배 이상 부풀어 오른 뜨거운 돈싸움이 펼쳐졌다. 애초에 역시 1억 가량의 계약금으로 현대를 택했던 김재걸을 돈싸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8]1994년, 현대의 제2리그 창단 추진과 '피닉스' (上)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8]1994년, 현대의 제2리그 창단 추진과 '피닉스' (上) 지면기사

    임직원 사기 올리려 '스포츠 주력'기존 구단들, 수백억 가입금 텃세정회장 '제 2리그' 창설 파격 행보1982년, 대한체육회장을 맡고 있던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전에 몰두하고 있었고, 동시에 프로야구의 성공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정 회장의 고향인 강원도 지역까지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야구팀을 맡아 달라는 프로야구 추진세력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원년부터 만루홈런이 펑펑 쏟아져 나오고 박철순과 최동원의 투혼이 드라마를 연출해내면서 프로야구가 모두의 예상을 깬 대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을 때도 정주영 회장의 인식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89년 MBC가 매물로 나왔을 때도 '적자기업은 인수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을 반복해 프로야구무대에 '저렴하게' 입성할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1992년에 벌어졌던 갑작스러운 사건들이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놓게 된다. 그 해 봄 정주영 회장은 국민당을 창당해 직접 '정권 접수'에 나서게 되고, 국민당은 불과 창당 한 달여 만에 참가한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확보해 일약 3당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그해 겨울 대선에서는 '반값아파트'와 '공산당 합법화', 혹은 '사재 2조 원 국가헌납' 등의 파격적인 공약과 안기부가 개입된 '초원복국집'에서의 관권선거공작을 도청해내 폭로할 정도의 정보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파란을 일으키며 김영삼, 김대중과 더불어 '빅3'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모은 400만 표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는 3위 낙선이었다. 정권 핵심층의 관권선거공작을 도청할 만큼의 배짱을 부리고도 낙선한 정주영은 곧 정치 이력을 1년 만에 마감하고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는 마치 총수의 사조직처럼 움직였던 현대그룹 임직원들의 사기 저하, 그리고 국민당의 외곽조직 혹은 패잔병조직 정도로 전락한 대외적인 그룹의 이미지였다.정주영 회장은 경영에 복귀해 처음으로 가진 사장단 회의에서 '임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7]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下)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7]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下) 지면기사

    LG, 1년간의 시험 끝에 전력 완성막강 마운드·타선, 압도적인 우승태평양도 10승대 투수 4명등 배출LG 못지 않게 반복되는 무리와 몸살의 악순환을 고민하던 팀은 태평양이었다. 태평양은 1989년,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만년꼴찌에서 3위까지 수직 상승하는 경이로운 돌풍을 연출했던 팀이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떠난 그 이듬해부터 곧장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그리고 정민태와 김홍집까지 돌아가며 부상으로 이탈, 단 한 번도 최상의 투수전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유령선 같은 팀이 되어 있었다. 그 악몽의 절정은 1993년이었다. 그 해 돌핀스는 공교롭게도 모든 주전급 투수들이 동시에 드러눕는 불운 속에 신생팀 쌍방울에게마저 멀찍이 따돌려진 채 선두 해태와 무려 43.5경기차로 벌어진 압도적인 꼴찌로 내팽개쳐지는 대참사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정동진 감독은 선수들에게 무조건 재활 우선의 사인을 보냈고, 감독 생명 연장을 위한 무리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래서 많게는 7승, 적게는 3승을 올렸을 뿐인 투수 여섯 명이 고르게 한 경기씩을 책임지고 가는 여유로운 운영을 이어갔고, 정명원과 박정현과 정민태 등이 통째로 한 해를 쉬며 느긋하게 몸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물론 그렇게 급할수록 돌아가는 운영의 대가는 한 해 뒤에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94년, LG는 1년간의 시험가동 끝에 완성된 신무기를 내놓을 수 있었고, 태평양은 1년간의 넉넉한 시간 동안 충분히 고치고 날을 세운 칼을 쥐고 나설 수 있었다. 1994년, LG의 마운드는 18(이상훈)-16(김태원)-15승(정삼흠)의 막강 선발 삼각편대로 시작해 김기범, 차명석, 차동철, 전일수로 두터워진 계투진을 거쳐 35세이브포인트의 마무리 김용수로 이어지는 완벽한 포메이션을 완성했다. 타선에서 터져 나온 유지현-김재현-서용빈 트리오의 폭발력과 만나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우승 중 한 장면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그에 견주기에 너무나 초라하지만, 태평양 역시 팀타율 최하위라는 악재 속에서도 네 명의 10승대 선발투수와 40세이브 신기록의 마무리투수를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6]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中)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6]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中) 지면기사

    선발-계투-마무리 '투수 분업'김용수 뒷문 단속, 역전패 불허정규리그 4위, 플레이오프 진출이광환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은 것은 서울 라이벌 OB에서였다. 프로원년 김영덕 감독 아래서 코치로 프로지도자의 이력을 시작한 그는 1988년 시즌을 마친 뒤 OB의 2대 사령탑이던 김성근 감독이 구단과의 불화 끝에 자진해서 물러난 자리를 물려받았고, 그곳에서 미국 유학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자율야구'의 기치를 올렸다. 자율야구란 선수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가도록 유도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평생 엄하고 험한 규율 속에서만 자라고 살아온 선수들이 자율을 이해하고 움직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반면 구단이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전임자를 밀어내고 이광환 감독에게 기회를 준 이유는 당장 우승을 해 보이라는 단순한 요구 때문이었다. 1989년에 일찌감치 하위권으로 밀려난 채 5위로 시즌을 마감한 데 이어 1990년에는 시즌 초반부터 연패를 반복했고, 결국 10연패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11연패에 빠져버렸던 6월19일에 그는 전격 해임당하는 쓴맛을 봐야 했다. 그래서 잠시 공백을 거친 뒤, 이번에는 백인천 감독이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가 털고 일어선 빈자리를 물려받은 LG에서 그는 무작정 각자에게 과정을 맡기는 대신 각자의 책임감을 끌어낼 수 있는 '구조'를 고민했고, 그 결과 1993년에 세상에 내놓은 것이 이른바 그가 명명한 '스타시스템'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선발 로테이션의 고정, 그리고 계투와 마무리로 이어지는 확실한 투수 분업 시스템이었다. 1993년 LG는 선발진에 김태원과 정삼흠을 축으로 삼아 김기범과 차명석, 그리고 신인 이상훈을 배치했고 8년차 베테랑 우완 차동철과 신인 좌완 강봉수를 필승계투요원으로, 김용수를 마무리로 고정했다. 그리고 선발투수에게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기든 지든 6이닝 이상을 맡겼고, 화급한 사정이 없는 한 마무리 투수에게 2이닝 이상은 맡기지 않았다. 물론 결과가 아주 신통한 것은 아니었다. 선발진의 에이스 정삼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5]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上)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5]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上) 지면기사

    단단했던 투수진 부상·부진 연속임기응변 마운드 운용도 '독으로'1992년 이광환 감독 부임 안정화 1993년의 프로야구는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을 홀로 상대하며 181개의 공을 던진 라이온즈 박충식의 투혼과, 하지만 투혼 따위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라는 듯 소리 없이 진군해 일곱 번째 왕좌에 오른 해태의 능숙한 세리머니 속에서 저물었다. 선동열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1992년 정상 고지에서 내려서야 했던 해태는, 이번에는 마무리투수로 재기해 0.73이라는 역대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을 세운 선동열의 힘으로 다시 정상을 탈환했다. 선동열이 완벽하게 뒷문을 틀어막자 온기가 선발진으로까지 번지며 다승왕 조계현을 필두로 송유석, 김정수, 이강철, 이대진까지 무려 다섯 명의 10승 대 투수가 배출됐다(선동열 자신까지 모두 여섯 명이 10승 이상을 기록). 그런 압도적인 마운드 아래서는 팀 타율이 2할5푼에 턱걸이한 물 방망이도 큰 장애요인이 될 수 없었다. 우승은 늘 그런 압도적인 위력의 에이스가 가져다주는 선물이었다.원년 OB는 우승의 제단에 박철순의 허리를 내놓았고, 1984년 롯데는 최동원의 어깨를 바쳤다. 그리고 1986년부터 해태의 왕조시대가 시작된 이래 잠시나마 그 숨 막히는 행군을 멈춰 세운 것은 한 편으로는 선동열의 부상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LG와 롯데에 내려진 김태원과 김용수, 염종석과 박동희 같은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1993년의 진정한 의미는, 그런 축복과 동떨어진 침침한 변두리에서 묵묵히 전진했던 이들에 의해 또 다른 길이 개척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듬해 패권의 주인공이 되는 LG,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대항마가 되는 태평양 돌핀스에 관한 이야기다.1990년에 창단하자마자 해태의 5년 연속 우승을 저지하며 왕좌에 올랐던 트윈스는 1991년 6위, 1992년에는 7위로 전락하며 바닥을 기어야 했다. 선수단의 명단은 1990년 우승 당시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김재박과 이광은이 1991년을 끝으로 각각 팀을 떠나면서 내야진을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4]연습생 출신 홈런왕 신화(下)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4]연습생 출신 홈런왕 신화(下) 지면기사

    1992년 41개 3경기당 1개 담 넘겨타격 순간 양팀 응원석 탄성 교차데뷔 5년만에 '완벽한 타자' 등극한국 프로야구 역시 홈런의 열매를 따먹으며 태어났고 자라왔다. 프로원년, 역사적인 개막전 연장 10회 말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과 그 해의 패권을 가른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초 김유동의 만루홈런은 당대 자타공인 최고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묶여있던 공백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만수와 김봉연의 영호남 홈런대결은 1980년대 내내 야구장을 끓어오르게 만든 최고의 연료였다. 하지만 1982년 80경기에서 22개의 홈런을 기록한 김봉연으로부터 1988년에 108경기에서 30홈런을 때려낸 김성한에 이르기까지, 날고 긴다던 홈런왕들이 기록한 홈런은 경기당 0.27개를 넘지 못했다. 1986년의 김봉연은 경기당 0.2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108경기 21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었다. 말하자면 4, 5경기쯤 연달아 관전해야만 그 선수가 홈런을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셈이었던 것인데, 경기당 0.4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베이브 루스가 '베이브 루스가 홈런 치는 걸 보기 위해 야구장에 가는' 풍경을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장종훈이 1992년에 기록한 홈런 41개는 시즌 경기당 0.325개에 해당했고 대략 세 번 경기장을 찾으면 한 번 정도는 '장종훈의 홈런'을 구경할 수 있는 빈도였다. 90년대 초반 서울과 부산의 '빅 마켓 팀'들의 강세와 더불어 장종훈의 홈런쇼는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모으는 가장 확실한 이벤트였다. 그렇게 한국프로야구는 300만 시대를 넘어 400만 시대의 코앞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그 해 그가 홈런을 때리는 순간 상대팀 응원석에서마저 탄성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그저 평범한 안타로 끝나는 순간에는 이글스 팬들마저 야유를 터뜨리는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입장료를 '안타가 아닌 홈런을 보는 값'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1992년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남겨둔 채 39홈런을 기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3]연습생 출신 홈런왕 신화(上)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3]연습생 출신 홈런왕 신화(上) 지면기사

    '정규시즌 1위' 확정지은 빙그레천적 해태와의 치열했던 17차전장, 0-0 박빙서 130m짜리 대포1992년 9월 17일, 빙그레(현 한화)가 해태(현 KIA)를 대전으로 불러들여 시즌 17차전을 벌이고 있었다.이미 열흘 전에 2위 그룹과 10경기 이상의 격차를 벌리며 일찌감치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지은 빙그레였지만, 해태와의 승부만큼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1988년과 1989년에 이어 1991년까지 세 차례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게 만들었던 아픈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그 해 역시 한국시리즈에서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2위를 달리던 해태였고, 또 역대 최강이라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완성하고도 빙그레는 유독 해태에게만은 시즌 4승 12패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해 역시 정성껏 쑨 죽으로 호랑이 밥을 챙기는 꼴을 벗어나기 어려울 듯 했다. 게다가 양 팀의 기둥투수 송진우와 이강철이 나란히 18승으로 다승 공동 선두에 올라 있었던 것도 은근히 신경을 쓰게 만들고 있었다. 정규시즌의 남은 경기는 17일과 18일 두 경기 뿐이었고, 그 안에 뭔가 결판이 나야 했다. 그 밖에 해태의 이순철도 롯데의 박정태를 누르고 최다안타 타이틀을 챙기기 위한 안타 한 개가 필요했다. 물론 어느 만큼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지만,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은 6-0으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5회 초에 선발투수 한희민을 내리고 송진우를 등판시켜 프로야구 최초의 '다승(19승)-구원(25 세이브포인트)' 2관왕을 배출했다. 그러자 이강철의 동료 문희수가 5회에 자진등판해 이정훈과 장종훈의 몸통에 화풀이를 하고 퇴장당하는 소동을 빚었고, 그렇게 격앙된 틈에서 다시 해태의 이순철은 7회 기습번트를 성공시키며 최다안타 타이틀을 확정짓는 150개째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기가 모두 세월 속으로 날아가버린 지금에도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남은 또 다른 대목이 있었다. 0-0으로 팽팽히 맞선 4회 말, 무사 1,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2]1991년, 롯데가 처음 달성한 '백만 관중'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2]1991년, 롯데가 처음 달성한 '백만 관중' 지면기사

    1984년 우승후 열기 사그라졌지만박동희·장효조·김민호 등 맹활약'탄탄해진 전력' 팬들 발길 줄이어1991년 9월 15일, 롯데는 그 해의 마지막 홈경기에 해태를 불러 들여 5-1로 승리했다. 시즌 내내 시달렸던 난적이었고, 그날의 승리를 합해도 6승 12패의 적자였지만, 어쨌든 깔끔한 마침표였다. 마운드에서는 오랜만에 제구가 잡힌 박동희가 해태 타선을 힘으로 짓눌렀고, 타석에서는 그 전 해 트레이드의 정신적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채 '처음 3할 이하로 떨어져보는' 수모를 당했던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대타로 출장해 홈런을 날리며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그날, 롯데는 한국 프로야구사에 또 하나의 빛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일요일이었던 그 날 관중석을 가득 채우며 그 해 100만 1천920명 홈관중을 기록해 첫 번째 '백만 관중 동원 팀'이 된 것이다. 그 해 롯데가 백만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을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던 극적인 우승을 이루어낸 1984년을 기점으로 폭발한 부산의 야구열기가 있었고, 1985년 10월에 완공된 3만 석 규모의 사직야구장이 그 열기를 그득히 받아내는 그릇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1984년의 우승 뒤 무려 6년 동안 가을야구에서 소외된 채 입맛만 다셔야 했고, 1989년에는 1984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롯데와 부산 야구의 상징이기도 했던 최동원을 쫓아내듯 떠나보내는 자책골로 끓어오르던 열기에 찬물이 끼얹어지기도 했다. 최동원만큼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투수도 찾기 어려웠고, 최동원에 이어 떠나보냈던 김용철만큼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타자도 다시 만나기 어려웠다.1991년, 부산야구에는 다시 봄기운이 돌아왔다. 박동희가 14승을 올리며 아마추어 시절부터 달고 다니던 '제 2의 최동원'이라는 수식어가 야구팬들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시즌 2승으로 삐끗했던 윤학길이 17승을 기록하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거기에 3년차 김청수와 고졸신인 김태형이 각각 두 자리 승수를 올리며 롯데는 일약 네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1]1990년 꼴찌 LG의 '각성'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1]1990년 꼴찌 LG의 '각성' 지면기사

    백인천 감독 '선 굵은 야구' 뒷심문병권, 5연속 완투승 만점 활약젊고 힘있는 선수들 주축 상승세1990년 6월 3일, 태평양과의 일요일 홈경기에서 5-0으로 완패한 LG 선수단은 한동안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라커룸에 숨어 있어야 했다. 100여 명의 분노한 팬들이 잠실구장의 본부석 출입문으로 몰려들어 백인천 감독에 대한 청문회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90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대혼전이 벌어진 해였다. 개막 후 두 달이 넘은 6월 초까지도 1위 빙그레부터 5위 삼성까지 1경기 차로 뒤섞여 있었고, 매 경기가 예비 한국시리즈라 불릴 만한 혈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5년 연속우승에 도전하는 해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해태에 세 번째 도전장을 던진 창단 5년 차 신흥강호 빙그레가 칼을 갈고 있었다. 거기에 전통의 강호 삼성과 지난 시즌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첫 플레이오프 진출의 기적을 연출했던 돌풍의 팀 태평양이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년도 꼴찌 팀 롯데도 거물신인 박동희와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김응국을 앞세워 봄 한때나마 선두경쟁에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유독 LG만 홀로 6경기 차로 멀찍이 떨어진 채 갈지자 걸음을 계속하는 태평세월이었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5위, 6위, 6위로 뒷걸음질 친 끝에 끝내 꼴찌까지 밀려나자 팬들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8년 만에 복귀해 MBC에 이어 LG에서도 초대 감독이 된 백인천은 그런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유가 넘쳤다. 특유의 '힘의 야구'를 구사하며 한 점에 연연하지 않았고, 감독석에서 연신 파안대소하는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속 모를 여유가 서울 팬들의 가슴을 긁어놓았는지도 모른다.어쨌든 그날의 청문회 소동이 약이 되었던지, 그 다음 경기일인 6월 5일 트윈스는 광주에서 김영직의 연속경기 홈런에 힘입어 해태와의 더블헤더 두 경기를 독식하며 탈꼴찌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마치 문득 정신을 차린 맹수처럼 그대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고, 6월 13일까지 무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0]1989년, 부산 '라이온즈' vs 대구 '자이언츠'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0]1989년, 부산 '라이온즈' vs 대구 '자이언츠' 지면기사

    '구단내 문제아' 'KS 새가슴' 낙인삼성-롯데 트레이드 성사 '팬 분노'자존심 상처 하락세 '쓸쓸한 퇴장'롯데는 해마다 연봉싸움에서 질기게 버티며 '물을 흐리는' 데다가 선수회까지 만들겠다고 앞장섰던 골칫거리 최동원을 처분하고 싶었고, 우승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독한 선수'라고 판단했던 삼성은 김시진을 내주고라도 최동원을 가지고 싶었다. 매번 한국시리즈 우승의 문턱에서 걸려 넘어지던 삼성으로서는 최동원이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거둔 4승이 김시진의 통산 111승보다 훨씬 무게있는 기록으로 여겨졌다. 김시진은 한국시리즈에서만큼은 그 때까지 7연패만을 기록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회심의 트레이드는 두 팀과 두 선수, 그리고 두 팀의 연고지 팬들 모두에게 만족이 아닌 상처만을 안겨 주고 말았다. 아직 너무나 단단하게 붙어있던 서로의 머리와 심장을 떼어내 바꿔 끼워 넣는 어설픈 수술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최동원은 구단의 고유권한인 트레이드 결정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았지만, 자신의 고유권한인 새 구단과의 계약을 거부하며 버텼다. 조건은 엉뚱하게도 롯데 박종환 단장의 퇴진이었다. 반면 김시진은 곧장 새 팀으로 옮겨 칼을 갈기 시작했고, 롯데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등판하던 1989년 4월 14일 OB와의 대전경기에서 자신은 절대 새가슴이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는 듯 14이닝동안 219개의 공을 던지는 오기를 발휘하며 완투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분노도 오기도 오래도록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김시진은 곧 4연패의 늪에 빠지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6월 말이 되어서야 삼성 입단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합류한 최동원은 준플레이오프 2차전과 3차전에 연달아 선발등판 했지만 모두 초반에 강판당하며 사상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태평양 돌핀스가 벌이던 자축연의 조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산의 팬들은 삼성의 유니폼을 입고 맞은편 더그아웃에 앉은 최동원이 눈에 띌 때마다 응원가 가사를 잊었고, 대구의 팬들은 롯데 유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9]1988년 '의외의 노히트노런'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9]1988년 '의외의 노히트노런' 지면기사

    느린 공 앞세워 삼진 없이 '대기록'선동열 상대, 버린카드였던 이동석무4사구 기적의 투구로 '깜짝 승리'선발투수가 단 한 개의 안타도, 점수도 내주지 않은 채 경기를 마무리하는 것을 노히트노런(No hit - No ru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점수와 안타 외에 4사구나 실책으로라도 한 명의 주자도 살려 내보내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한다면 퍼펙트게임(perfect game)이라는, 한 층 더 명예로운 기록이 만들어진다.노히트노런을 달성한다고 해서 투수에게 2승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당한다고 해서 상대 팀이 2패를 감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늘 나오는 기록이 아니다보니 삼십여 년 전에 작성된 기록도 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언급되고 되새겨진다. 1988년에는 두 번의 노히트노런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두 번 다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던 순간에 튀어나온 의외의 기록이었고, 또 노히트노런 치고도 자주 보기 어려운 희귀한 기록들이었다.그 희귀한 이변이 시작된 것은 시즌의 출발점인 4월 2일이었다. 그날 사직 개막전의 OB 베어스 선발로 내정되어있던 김진욱이 경기 당일 오전 연습 때 동료 타자 김광림의 연습타구에 급소를 맞아 병원으로 실려가는 사고가 터져버린 것이 발단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김진욱을 대신할 선발투수로 낙점한 것은 장호연이었다.그 무렵 OB 안에서 가장 빠르고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가 김진욱이었다면, 반대로 가장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는 장호연이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당대의 해설가들이 미처 따라가며 이름붙일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기괴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만루에서 4번 타자를 상대하는 순간에조차도 '이깟 공놀이쯤'이라고 말하는 듯 한 표정으로, 혹은 열 살짜리 아들에게 배팅볼이라도 던져주는 듯한 느낌으로 싱글거리고 이죽거릴 수 있는 별난 여유가 있었다.그 날의 투구가 그랬다. 장호연은 거의 스트라이크존에 들어가는 공이 없을 만큼 빙빙 돌며 '낚시질'을 했고, 롯데 타자들은 대단한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앞 다투어 초구와 2구에 방망이를 휘둘렀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8]최동원-선동열 마지막 맞대결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8]최동원-선동열 마지막 맞대결 지면기사

    최, 209구 던지며 8탈삼진 2실점선, 232구 10탈삼진 2실점 '맞불'두 태양의 '전설로 남은' 명경기1984년에 정규리그 27승과 한국시리즈 4승을 기록하며 가장 높은 곳에 떠올랐던 최동원이라는 태양은 85년 20승, 86년 19승으로 중력을 무시하는 궤도를 그렸고, 1985년에 혜성처럼 나타난 선동열은 86년과 87년에 거푸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무섭게 솟구치기 시작했다.선동열이 24승과 0.8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던 1986년, 최동원 역시 19승과 1.55를 기록하며 아직은 물러설 때가 아니라는 오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해에는 최동원과 선동열이 두 번에 걸쳐 선발 맞대결을 벌여 한 번씩의 완봉승과 한 번 씩의 완투패를 나누어 갖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미처 판가름내지 못했던 승부가 이어진 것이 1987년, 5월 16일이었다. 1회 초와 말이 모두 삼자범퇴로 처리되며 싸늘하게 시작된 경기는, 그러나 2회 말 롯데가 김용철의 볼넷과 김민호, 정구선의 연속안타로 만든 무사 만루의 위기에서 해태 내야실책을 틈타 먼저 2점을 선취하며 균형이 깨졌다. 하지만 최동원도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었다. 몇 해 동안 조금도 늦추지 않고 전력투구만을 강행해온 무모한 행보 탓인지 구속은 '최동원'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것이었고, 그렇게 무뎌진 속구는 커브의 위력마저 반감시키고 있었다. 그는 3회 초 2사 2루에서 서정환에게 적시타를 맞아 추격의 1점을 내주었고, 5회에도 선두타자 김일권에게 안타를 내준 데 이어 차영화에게 큼지막한 2루타까지 내주는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해태 김무종의 번트 실패 덕분에 선행주자 김일권을 잡아낸 데 이어 롯데 포수 김용운이 정확한 홈 블로킹으로 해태의 대주자 이순철까지 홈에서 잡아내며 실점 없이 넘겼지만, 위기는 이어졌다.하지만 그 날의 승부의 핵심은 힘과 기술이 아닌 자존심과 뚝심이었다. 선동열은 초반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곧 냉정을 되찾았고, 최동원은 초반의 안일함을 자책하듯 열정을 끌어올렸다. 해태와 롯데의 타자들은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7]시대를 뛰어 넘은 큰 별과 국보 에이스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7]시대를 뛰어 넘은 큰 별과 국보 에이스 지면기사

    최, 홀로 팀 정상으로 이끈 슈퍼맨'비교 불가' 강속구로 마운드 호령선, 韓야구 전무후무 '0점대' 투수최동원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경남고 2학년 시절이던 1975년,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당대 최강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무려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 행진을 벌이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야구가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처음으로 국제대회를 제패했던 1977년과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올랐던 1978년 이후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된다. 이제 막 대학 1, 2학년이던 시절이었다.그로부터 1982년까지 6년 동안 그는 연세대와 실업팀 롯데에서 늘 팀이 치르는 경기의 절반 이상을 감당하는 마당쇠였고, 그렇게 거의 혼자 힘으로 늘 팀을 정상에 끌어올리는 슈퍼맨이었다. 부상으로 거르다시피 했던 1979년을 제외하면 해마다 대학무대에서 한 번 이상씩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고, 1981년에는 실업리그와 캐나다 대륙간컵대회에서 다시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특히 혼자 6차전까지 모든 경기를 책임지다시피하며 김시진이 이끌던 경리단을 물리치고 롯데의 역전우승을 이끌었던 1981년 실업리그 코리언시리즈는 최동원이라는 이름이 곧 투수, 혹은 야구 자체를 상징하게 만든 대사건이었다.하지만 그동안 한국야구사를 수놓았던 수많은 별들의 이름 속에서도 최동원의 이름이 각별한 빛을 발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단순한 '당대최고'가 아니라 '당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투수였기 때문이다.그의 공은 요즘처럼 '공의 위력으로' 배트를 누르며 파울을 양산하는 '강한 공'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의 속구는 그야말로 다른 투수들의 빠른 공과 시속 10㎞ 이상의 차이를 내는 비현실적인 스피드로 상대 타자의 인지능력과 운동능력의 한계를 비웃는 '마구'였던 것이다.프로무대에서 1984년에 시즌 27승을 올린 데 이어 한국시리즈 4승을 전담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것을 비롯해 4년간 75승을 기록한 뒤 맞이한 1987년, 최동원의 나이는 서른이었지만 이미 신체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6]1986년, 한국야구 첫 번째 세대교체 (하)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6]1986년, 한국야구 첫 번째 세대교체 (하) 지면기사

    청보 김신부 언더핸드 '느린 공'해태 차동철도 변화구가 주무기프로데뷔 첫해 막상막하 맞대결 하지만 그 해 신인투수들이 보여준 가장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은, 7월27일 인천 도원야구장이었다. 그 날 청보 핀토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내세운 선발투수는 각각 김신부와 차동철이었고, 두 사람 모두 그 해 한국프로야구 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이들이었다.차동철은 치열했던 1981년 광주일고를 이끌고 늘 전국무대에서 일정한 성적을 내던 에이스급 투수였다. 하지만 팀 내에서는 한 해 선배 선동열과 비교되고, 전국무대에서는 박노준, 김건우, 성준 같은 동기생들과 비교되며 조명받지 못했던 처지였다. 건국대를 거쳐 입단한 그 해에도 같은 광주 출신의 김정수에게 밀리며 큰 기대를 받지는 못 하는 처지였다.반면 김신부는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를 거친 재일교포였다. 한국만큼이나 대단한 고교야구 열풍이 불었던 1981년 일본에서 김신부는 거의 혼자 힘으로 고시엔 우승을 이끌며 일본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서 긴테스에 전체 1번으로 지명되었던 김의명과 관서지역에서 오랜 라이벌관계를 맺어온 투수. 김신부 역시 난카이에 1차로 지명됐고 김의명과 나란히 2억 원에 가까운(6천만 엔) 초고액의 계약금을 요구하며 자존심 싸움을 벌여 파란을 일으켰던 화제의 주인공이었다.하지만 결국 4년간 1군 무대에서 단 한 경기도 경험하지 못한 채 방출된 뒤 한국으로 건너왔고, 그 시점에서는 대학에서 4년을 보낸 차동철과 똑같은 23세의 동갑이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건 일본에서건 '프로야구 1군 무대'는 처음 경험하는 처지였다.그 두 투수가 만났던 7월27일이 그 해를 상징한다고 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그 날 두 투수는 나란히 15이닝을 던졌고, 두 사람 모두 단 한 점의 실점도 하지 않았다. 한국프로야구역사상 전무후무한 '15이닝 완봉 맞대결 무승부경기'였다. 차동철의 기록은 10피안타6탈삼진이었고 김신부의 기록은 8피안타 10탈삼진이었다.김신부는 원래 정통파 스타일에서 사이드암을 거쳐 언더핸드로 전향한 스타일로서, 직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5]1986년, 한국야구 첫 번째 세대교체 (상)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5]1986년, 한국야구 첫 번째 세대교체 (상) 지면기사

    '최대어' 朴, 부상·피로누적 침체金, 데뷔 시즌 최다 18승 '신인왕'성준·이상군도 15승·12승 맹활약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직전이었던 1981년, 한국야구의 메이저무대였던 고교야구 최고의 팀은 단연 선린상고였다. 선린상고의 쌍두마차 박노준과 김건우는 2학년생이던 1980년에 이미 한 해 선배들인 선동열(광주일고)과 이상군(천안북일고)을 때려 부수며 전국적인 선수로 자리잡고 있었다.같은 해 경북고의 성준, 광주 진흥고의 김정수 등이 나름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지만 선린상고 듀오와는 이름값에서 한 단계의 격차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중에서도 대중의 관심과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박노준이었다.박노준은 리틀야구 시절부터 나가는 대회마다 자신의 독무대로 만들었던 '천재'였다. 그리고 고교 2학년이던 1980년에는 이미 초고교급으로 불리던 대형투수 선동열과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맞대결해 타자로서는 홈런 포함 3안타 3타점을 뺏는가 하면 투수로서도 5이닝 2안타 1실점으로 광주일고 강타선을 잠재우는 KO승을 거두기도 한 일인자였다.게다가 날카로운 콧날과 턱선에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눌러썼던 모자와 헬멧이 풍기던 과묵한 카리스마가 '독일병정'이라는 멋진 별명을 얻게 했다.각자의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 위해 반드시 박노준을 쓰러뜨려야 했던 성준뿐만 아니라, 늘 뒤지지 않은 활약으로 함께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도 늘 초점 흐린 배경으로만 남겨지던 김건우도 마찬가지였다.박노준 하나만을 떠올리며 절치부심했던 성준은 그 해 경북고에 전국대회 3관왕의 영광을 안길 수 있었고, 뒤늦게 투수훈련을 시작한 김건우는 그 해 7월 미국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우승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끝내 무관의 제왕으로 전락한 선린상고는 불운의 절정이었던 1981년 8월26일, 그 모든 영광들을 한 편의 비극에 쓸려 보내고 말았다.그날 봉황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홈 슬라이딩을 하던 박노준의 스파이크가 덜 마른 그라운드에 박히면서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벌

  •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4]1985년 김시진-최동원 맞대결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4]1985년 김시진-최동원 맞대결 지면기사

    결정적 순간마다 고개 숙였던 金숙적 崔 상대 7.2이닝 2실점 승리기세 오른 삼성, 그 해 '통합우승'1985년 8월 6일과 7일에는 부산에서, 그리고 하루 건너 9일부터 12일까지는 대구에서 선두 롯데와 2위 삼성의 5연전이 치러져야 했다. 후기리그 일정의 절반을 막 넘어서던 그 시점에서 롯데와 삼성의 승차는 4.5였고, 삼성과 3위 해태의 승차는 2였다. 롯데로서는 2승만 건져도 승차 3.5를 유지하며 선두자리를 굳힐 수 있는 기회였고, 삼성으로서는 더 이상의 격차를 허용하면 2위 자리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위기였다.부산에서의 2연전은 말 그대로 탐색전이었다. 롯데는 1차전에 박동수를 세웠고 삼성은 진동한과 권영호로 맞섰다. 그리고 타격전 끝에 7대 5로 삼성이 승리했지만, 2차전에서도 롯데는 그 해 단 한 번도 승리를 기록하지 못한 이진우를 내세웠고 다시 삼성 황규봉에게 완봉패를 당하며 2연패로 몰리게 된다.더 이상 밀릴 수 없었던 롯데에게는 '언제라도 필요한 1승을 만들어 줄' 구세주 최동원이 있었다. 8월 9일 대구에서 열린 3차전에 롯데가 최동원을 선발로 내보낸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삼성이 에이스 김시진을 그 경기에 등판시키는 맞불을 놓은 것이었다.만약 그 5연전에서 4승 이상을 잡겠다는 욕심을 가졌다면,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그 경기를 버리는 대신 4,5차전에 김시진과 김일융을 투입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었다. 잡을 경기와 버릴 경기를 뚜렷이 구분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차피 선두 팀을 상대로 한 5연승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반대로 이미 전기리그를 우승한 삼성 입장에서는 져도 큰 타격이 없을 상황에서 최동원의 기를 꺾어보자는 모험을 걸어볼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먼저 흔들린 것은 김시진이었다. 동갑내기로서 고교시절부터 실업시절을 거치며 라이벌로 불렸지만 늘 결정적인 고비에서 패퇴하며 2인자로 낙인찍혔던 김시진으로서는 필생의 숙적을 상대로 또다시 썩 유쾌하지 않은 시험대에 오른 것이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롯데는 1회 초 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