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과 함께 장타 '3경기당 1홈런'
30호 아치때 이미 32호 도루 달성

그 해에 태어난 선수들 중 염종석, 정민철, 안병원 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에 데뷔한 것이 1992년이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던 73년생의 핵심멤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무대에 나타난 것은 1996년이었다.
그 해 야수로서 주목받은 '92학번'들은 박재홍과 김종국, 그리고 홍원기였다. 그 중 박재홍이 4억원대, 김종국과 홍원기가 2억원대의 몸값과 그만큼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프로 데뷔 공식경기인 시범경기 개막전에 선두타자로 나선 첫 타석에서 초구 홈런을 날리며 '또 한 명의 이종범'으로 이름을 알린 해태의 김종국과 시범경기 8할 타율을 기록한 한화의 홍원기였다.
반면 박재홍은 파워와 스피드 어느 면에서도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고, '고비용 저효율'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박재홍은 고교시절에는 시속 140킬로미터 이상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파워와 스피드와 수비력을 겸비한 견실한 내야수였기에 어느 면으로든 쓸모를 찾을 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박재홍은 오직 고향 팀이라는 명분과 1차지명이라는 못마땅한 무기의 힘을 빌려 헐값에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는 프로팀의 의도에 순순히 끌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박재홍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자신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계약조건을 제시받아, 지명을 거부하고 실업팀인 현대 피닉스와 계약을 했다.
그렇게 굴러들어온 복덩이를 잡은 현대는 아직 입단하지도 않은 그에게 최상덕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새로 창단한 프로팀 현대 유니폼을 입히는 수완을 발휘했다.
현대의 창단감독 김재박이 박재홍에게 맡긴 임무는 공격의 첨병이었다. 3루수 자리에는 이미 거구의 3할 타자로 성장한 권준헌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김인호와 김성갑이 주고 받았지만 누구도 2할대 중반조차 넘기지 못했던 1번타자 자리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피드와 주루 감각만큼은 아마와 프로의 격차가 크지 않은 영역이었고, 아직 다듬어지거나 검증되지 못한 단신의 박재홍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박재홍은 개막하자마자 안타의 절반 가까이를 장타로 연결했고, 3경기에 하나 꼴로 홈런을 날려대며 4번 타자 김경기마저 제치고 홈런랭킹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0경기쯤 소화한 뒤로는 아예 홈런 단독선두로 질주하기 시작했고, 김재박 감독은 '자동 원아웃'으로 경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선두타자의 공백을 감수하고라도 그를 3번 타순으로 옮겨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7월16일, 박재홍은 한화와의 청주 원정경기에서 3회 초 이상목을 상대로 3점 홈런을 빼앗아내며 20-20을 완성했다. 신인으로서는 두 해 전 김재현에 이어 두 번째, 통산으로는 8번째였고, 그 여덟 번 중 가장 적은 경기 만에 기록한 것이기도 했다.
또 9월3일, LG와의 잠실 원정경기에서 선발로 전향한 김용수를 상대로 박재홍의 배트가 둔탁하게 밀어낸 공은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 스탠드에 박혔다. 시즌 30호 홈런. 그리고 이미 8월25일에 달성해두었던 32도루와 함께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30-30'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박재홍이 가지는 위상은 각별하다. '최초'일 뿐만 아니라 1996년에 이어 1998년과 2000년에도 30-30을 성공시키며 '최다'의 주인공이며, '유일한 다수 성공'을 통해 시즌의 특수성과 가장 관련이 적은 사례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김은식 야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