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관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이날의 북적임과 소란은 무언가 달랐다. 상기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청년들, 시끌벅적 신이 난 아이들의 손을 꼭 붙잡고 감회에 젖은 중년의 부부.
삼삼오오 모여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고 근황을 묻는 모양새가 흡사 동창회라도 열린 듯 싶다. 지난 달 25일 오후, 경기도미술관은 아주 특별한 행사를 열었다.
이른바 '홈커밍데이'. 최북단 대성동 초등학교부터 최남단 가파도 초등학교까지 전국 5만 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만든 벽화프로젝트 '5만의 창, 미래의 벽'이 올해로 꼭 10년이 돼서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 동안 그림을 그렸던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벽화에 담았던 아이들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고사리 같은 꿈을 소중하게 다루었던 자원봉사자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10년이라는 숫자를 앞에 두고 미술관은 재밌는 상상을 펼쳤다. 그때의 모두가 한자리에서 만나 과거의 꿈과 현재의 우리, 미래의 희망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10년만에 집으로 돌아온 꿈은 또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까.

정겹고 설레는 소식에 벽화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제작한 강익중 작가가 미국 뉴욕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는 몹시 설레고 흥분된 모습이었다.
"벌써 10년이 됐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솔직히 놀랐어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 얼마되지 않은 일 같거든요. 10년 만에 그때의 아이들을 만나보니, 정말로 다 큰 아이들도 있고 이제 어엿한 가장이 된 친구도 있어 새삼 감회가 새로워요."
실제로 이 날 행사에는 당시 벽화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이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그중에서도 당시 소위였던 최원정씨는 소령으로 진급해 현재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다.

강익중 작가의 어린이벽화프로젝트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20년간 그는 100만 여장의 어린이벽화를 모았다. 벽화는 꿈을 담았다. 그는 작품을 어린이 병원과 학교, 미술관 등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공간에 기증했다.
뉴욕 휘트니미술관에 그의 초기 3인치 그림 6천점이 소장됐을 만큼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가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가려고 탄 버스 안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가로·세로 3인치로 잘라 들고 다녔다. 그것이 훗날 강익중의 '시그니처'가 됐다.
그는 왜 어린이의 꿈을 담을까.
"어른들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재단하지만, 아이들은 자기의 미래를 끌고 와서 현재를 바라봐요. 자기들이 상상하는 만큼 현재가 완성되죠. 그래서 아이들의 꿈을 통해 미래를 가보고 싶었어요. 그게 5만의 창, 미래의 벽의 최초 기획의도였죠. 그때의 시도가 저에게 아주 큰 의미가 됐고 성공적이었다고 봐요.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어린이들의 꿈을 담은 그림을 모았어요. 아이들의 희망이 담긴 상상의 미래와 긍정의 에너지가 세계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의 작업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굳이 그가 공공미술을 해서가 아니라, 강익중에게서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밝고 긍정적이다.
"보통 예술은 'to the people' 인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거죠. 근데 제가 생각하는 공공미술은 'with people'에 가까워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예술이죠. 그래서 저는 공공미술을 저만의 별칭으로 바꿔 부르는데, '명랑한 혁명'이라고 불러요. 혁명엔 지도자와 사람 그리고 대의명분이 필요해요. 공공미술도 나로 인해 프로젝트가 시작됐지만, 아이들이 모이고 어른들이 함께 하면서 의미가 확장돼요. 특히 5만의 창 프로젝트의 대의명분은 '평화'예요, 하나의 몸인데, 우리는 갈라져야 하는 상처를 겪었어요. 하지만 상처가 있어야 치료백신도 만들수 있는 만큼, 대립과 갈등의 아픔을 겪어본 우리야말로 세계의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평화를 그리고, 평화가 찾아 온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상상할 수 있어야 해요."
남북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모티브로 꾸준히 작업을 해 온 그에게 올 한해 연이어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남다른 영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전세계 언론이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서 악수하고 포옹하는 모습을 주요 장면으로 선택했는데, 우리와 같이 분단의 아픔을 겪은 독일만 달랐어요. 독일의 권위지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는 대성동 초등학교의 어린이 그림이 남북정상회담을 상징하는 주요 장면으로 선택됐죠. 독일은 통일을 어린이의 미래로 바라본 거예요. 저도 독일과 마찬가지 생각을 합니다. 통일은 어망을 짜는 일이에요. 우리는 어망을 짜는 일에만 급급해요. 어망이 완성된 다음에 함께 어떤 꿈을 꿀 것인지, 하물며 월드컵 챔피언이 되겠다, 달에 우주선을 띄우겠다 등 미래의 꿈을 꿔야 해요. 그건 아이들의 몫이죠. 그래서 아이들이 아주 자유롭게, 꿈을 너무 크게 꿔서 우주로 날아가버린다해도 좋을 만큼 상상의 나래를 펼쳤으면 좋겠어요. 벽화는 그것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되는거죠."

그래서 그는 오래 전부터 가슴 속에 품어왔던 꿈을 끄집어냈다.
언젠가 임진각에 아이들의 꿈을 그린 벽화가 가득 뒤덮인 '꿈의 다리'를 연결해 남과 북을 잇는 것. 인터뷰마다 심심찮게 밝혀 온 그의 꿈은 요즘 더욱 그를 설레게 한다.
"작가로서 꼭 해보고 싶은 도전이에요. 제가 계속 떠들고 다니다보면 정말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요. 그렇게 서로 힘을 합치면, 분명히 언젠가 가능해질겁니다. 누군가는 묻죠. 강익중씨, 당신은 정치인입니까. 저는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왜냐면 작가는 어망을 던지고, 과학자는 고기를 끌어올리고, 경제인은 도마에 고기를 올려 자르며, 정치인은 자른 고기를 배분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정치의 목적이 사회적 배분이고, 예술의 목적은 사회의 화두를 던지는 일이거든요. 결국 예술이나 과학, 경제, 정치 모두 하나의 사이클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예술이 화두를 던지고 가능성을 열기 때문에, 비록 작은 움직임일지라도 나비효과처럼 기적이 일어날 수 있어요. 경기도에서 자란 아이들의 꿈이 전국에 퍼지고, 전세계로 흘러가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어요. '상상력'은 우리를 어디로든 데리고 갈 수 있으니까요."
글·사진/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강익중 작가는
▲1960년 충청북도 청주 출생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학사
▲프랫대학교 대학원 석사
▲수상 내역
1997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1997년 제47회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2007년 엘리스 아일랜드상
▲전시회
1994년 백남준, 강익중 2인전 - 멀티플 / 다이얼로그 (휘트니미술관, 코네티컷)
1999년 십만의 꿈
2001년 amazed World (UN)
2007년 광화문 가림막 - 광화의 꿈
2008년 희망의 벽
2009년 백남준, 강익중 2인전 - 멀티플 / 다이얼로그 (국립현대미술관)
2010년 2010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외벽 - 내가 아는 것
2011년 강익중 대 강익중 (포스코미술관, 서울)
2016년 Floating Dreams (런던 템스강, 영국)
2017년 내가 아는 것 (아르코미술관,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