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001000338300016602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보면 /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 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

꽃 속에 번개가 있고 /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

꽃 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대붕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

고재종(1957~)


권성훈_교수.jpg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진정한 권력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종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꽃처럼 한순간에 취한 향기로 감정을 사로잡듯이 자유의지를 내려놓게 하는 것이야말로 비폭력적 권력이다. 그렇게 '꽃의 권력'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로 자연스럽게 꽃 속에 파묻힌다. 꽃향기 속에서 '알 수 없이 해독'되는 진한 황홀은 '번개'처럼 뇌수를 마비시키며 가던 길을 멈추고 꽃길을 가게 한다. 이것은 꽃이 피어 올린 귀하고 아름답고 숭고한 생명의 꽃대가 선사하는 세례에 무릎을 굽히는 것이니. 거기에 '벌 나비가 먼저 알고' 찾아오는 것은 다음을 기약하는 축제의 씨앗을 퍼트리기 위함이다. 여기서 보면 인간은 권력이라는 공인된 힘을 지배의 수단으로 강제적으로 사용한다. 그렇지만 매번 개인의 욕망으로 치달아 실패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점에서 꽃의 엔딩이 될 수 없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