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수 년 터로 삼던 서울을 떠나면서 습관처럼 드나들던 식당과 멀어진다는 사실이 슬펐다. 호불호 음식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평양냉면(평냉)을 파는 음식점이 내겐 그랬다.
좌표를 잃고 헤매던 어느 날, 단비처럼 '남북상회'를 만났다. 수원 중남부에 드물게 보이던 평냉집이 수원 서부(호매실)에도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데 거기다가 맛도 있다니, '평냉 실향민'인 내게 기댈 언덕이 생긴 것이다.
남북상회란 상호명에 맞게 이 집은 평양냉면 같은 이북음식과 곰탕, 양선지해장국 따위의 남쪽 음식을 메뉴로 선보인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집 주인공은 평양냉면. 냉면 외형은 단출하기 그지없다. 고명으로 계란 지단과 오이, 수육 몇 점과 파가 전부다.
하지만 냉면 육수를 들이켜면 그때부터 반전이다. 소고기 육수가 '촤르르' 입안 전체를 감싸기 시작하면서 '아 이 집 보통 아니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메밀 함량 70~80%로 높여 '향긋한 면발'
제법 큰 만두 고기대신 고소한 두부 풍미
곰탕·양선지해장국 등 남쪽 음식 '배려'
평양냉면 육수를 내는 방식은 음식점마다 제각각이다. 순수하게 고기만을 푹 삶거나, 사골을 우려내 고기 육수와 섞는 곳이 있다. 동치미와 고기 육수 간 배합으로 육수를 완성하기도 하는데 이 집은 철저히 고기 육수만을 고집한다.
동치미를 섞으면 상할 염려도 있고 맛의 편차가 큰데, 고기 육수만 써 맛을 일률적으로 유지하고 고기 본연의 깊은 맛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게 주인장의 말이다.
냉면 맛을 좌우하는 면발도 남다르다. 반죽은 메밀과 밀가루를 섞는데, 메밀 함량을 70~80%까지 높여 메밀의 향긋함을 한껏 맛볼 수 있다. 냉면 가닥들엔 거뭇거뭇한 모습이 눈에 띄는데, 이는 메밀껍질을 반죽에 섞어서다. 씹는 재미를 더하기 위한 주인장의 세심한 손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집 주인장은 서울 유수의 냉면집 주방 이곳저곳을 거쳐 여기에 왔단다.
'사이드'메뉴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만두도 마찬가지. 이 집 만두 속을 채우는 건 고기 대신 두부다. 살찌운 납작 만두 형태의 그것을 입에 넣으면 고소한 두부의 풍미가 퍼진다.
호불호 강한 평양냉면집을 약속 장소로 삼기란 아무래도 껄끄럽다. 주인장도 그걸 아는지, 곰탕과 양선지해장국같이 익숙한 메뉴들이 보인다. '평양냉면집에 왔으면 식초도, 겨자도 넣지 않은 물냉면을 먹어야지'라는 훈수 따위를 두지 않아도 각자 선호에 따라 음식을 고를 수 있는 보기 드문 평양냉면집이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