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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 시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마침내 인도에서도 시청률 1위로 올라 전 세계를 석권했다고 한다. 우리가 만든 콘텐츠가 세계인의 시선을 끌었다는 게 자랑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영화 '미나리'나 케이팝의 '방탄소년단'이 외국인에게 갈채를 받긴 했어도 이건 마니아층에 어필된 것이라면, 이 넷플릭스 드라마는 개인의 안방까지 침투하였다는 점에서 훨씬 파급력이 커 보인다. 그러면서 오랜 세월 대중문화는 미국과 유럽 중심주의로 생산 소비되어 왔는데, 이제 한국 같은 제3 국가에서 새로이 세계적 영향력과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그 성취가 놀랍게 느껴진다.

이 '오징어 게임'을 보며 나는 두 가지를 떠올린다. 하나는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요즘 우리 사회의 소위 말하는 '잉여계급'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용어는 '소속이 없어 자기 정체성을 규정할 역할이 없는 층'을 일컫는 사회학 용어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몫이 없는 자들', 즉 실업자, 탈북소녀, 소외노인, 비정규직, 알바생, 대리기사 등 일정한 그룹 내의 '셈법에 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결과물인 이들 그룹은 지금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전 세계에서 이 드라마가 공감을 일으킨 것은 빈부의 격차가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심화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오징어 게임'… '잉여계급' 잘 반영
불안한 삶 사는것 알면 다행이지만
판단조차 못하면 영혼없는 좀비 돼


드라마에서는 첫 게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절반 이상이 잔혹하게 죽어 나가자, 살아남은 참여자들이 과반수 찬성함으로써 게임을 중단한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곧 '자발적'으로 되돌아와 두 번째 게임을 이어나간다. 승자가 되기보단 죽을 게 거의 뻔한 데 왜 돌아왔느냐고 묻자, 바깥세상에선 돈도 없고 가족은 흩어지고 빚은 갚을 길이 없다고, 그러니 "현실이 게임보다 더 지옥 같아서 왔노라"고 대답한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거라면, 대박의 꿈이라도 꿔보는 게 낫지 않느냐는 절규로 들린다. 출구가 없는 막힌 공간에서 자신이 경마게임의 한 마리 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 그리고 그걸 자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처절한 비극인가.
 

이 드라마가 잔혹하면서도 흡인력을 갖는 건 바로 시청자들에게 연민과 함께 동질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바로 '주체 소멸'이라는 점이다. 이 역시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비극 중의 하나인데, '오징어 게임'을 설계한 사람도, 게임에 참석한 '루저'들도, 또 심지어는 그것을 보며 즐기는 우리 시청자들도, 사실은 모두 '부유하는 존재'들이다. 디지털화되고 빠르게 통신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충분한 지식과 조직화된 정보를 갖게 되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런 '유동적'인 지식은 뿌리가 없으므로 주체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부유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사유를 잃고, 불안 속에서도 행복한 척하며 살아간다. 그나마 자신이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인지하면 다행이지만, 그런 판단조차 흐려지는 순간 우리의 주체는 거품처럼 사라지며 영혼 없는 좀비가 된다. 좀비는 지옥 같은 세상을 사는 잉여에게든, 권력과 돈을 누리고 천국 같은 세상을 사는 속물에게든, 똑같이 찾아온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일상은 먹방·오락 TV와 SNS로 대부분 채워지고 있다. 그러다 우리가 파워를 끄는 순간 스크린은 증발하고, 빈 시공간에 오로지 좀비가 된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는다.


서로 죽여야하는 '신자유주의 비극'
참으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것 역시 신자유주의가 설계한 게임 일부가 아닐까 의심하곤 한다. 좀비가 된 세상에서 서로를 죽여야 하는 곳, 이곳이 바로 지옥이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로 나오는 노인은 "돈이 아주 많은 사람과 돈이 전혀 없는 사람의 공통점은 삶이 모두 재미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감독이 던지는 중요 메시지 중 하나로 읽힌다. 나는 여기에 "이 드라마를 즐기는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이고 싶어진다. 좀비이면서 자신이 좀비인 줄 모르는 우리가, 스스로 좀비임을 커밍아웃한 잉여와 속물들의 끔찍한 게임을 바라보는 건, 참으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한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