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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벌(성환) 전투 직전 일본군 모습. /평택시 제공

"평택 소사벌지구라는 명칭은 현 평택시 소사동의 이름을 본 따 만들어진 이름 인가요. 아닌가요. 정답은?"

시간을 거슬러 2004년 5월. 당시 건설교통부는 평택시 비전동, 죽백동, 동삭동 일대 105만 평을 '소사벌지구'로 명명한 공공 택지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정부가 수도권 주택 공급을 목적으로 추진한 사업이었지만, 지자체와 사전 협의가 없어 논란이 발생했다. 먼저 이 곳 토지주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갑자기 자신들의 토지가 강제 수용될 상황에 놓이게 되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을 땅을 지키겠다는 사람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결사 항쟁에 나섰다.

정부에서 하향식으로 이름 지은 '소사벌지구' 명칭도 엄청난 반발을 샀다. 소사벌은 오래전부터 남평택 일대의 평야 지대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돼 오긴 했다.

그러나 '소사'라는 명칭의 지역(현 소사동)이 따로 존재하기에 소사벌 지구로의 명명은 오류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명 오류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당시 소사벌지구 명칭을 소사(현 소사동) 지역과 상관없는 곳에서 사용하면 마을의 정체성마저 훼손시킬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가 지역사회에 번져 나갔다.

소사 지역은 한반도의 중요 교통로인 삼남 대로가 지나간다. 청일전쟁의 '소사벌전투(성환전투)'도 이 지역에서 펼쳐 지는 등 과거의 역사를 품고 있다.

한편 토지주들의 반발은 일단락돼 사업이 추진됐지만, 명칭 변경과 관련한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4년 12월 건교부는 소사벌지구 91만 평을 최종적으로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지정했다.

2006년 7월에는 해당 개발계획에 대한 경기도의 승인에 이어 2008년 토지조성공사가 시작됐다. 2010년 이후에는 '소사벌' 명칭이 들어가는 아파트와 상가들이 들어섰다.

이에 '기존 소사 동과 소사벌지구 사이에 명칭 혼란이 현실화됐다'며 지역 사회에서는 또다시 소사벌지구의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었다.

실제 2014년 9월 평택시 지명위원회에서 '소사벌지구 마을 및 시설물 명칭 부여' 관련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소사벌지구 전체를 4개 지역으로 나눠 그 각각을 이곡마을, 배꽃 마을, 가내마을, 배다리 마을로 부르자는 결과를 도출하고, 합의했다.

하지만 소사벌지구라는 명칭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 각인된 상태였고, 기존에 있던 상가뿐 아니라 새로 생겨난 상가들도 꾸준히 '소사벌'을 상호에 넣었으며 민간 아파트명에도 '소사벌'이 활용됐다.

그 결과 소사벌지구라는 이름은 더욱 굳어져 지금에 이르게 됐지만, 아직도 '소사벌지구'와 '소사동'의 명칭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 소사벌 전투, 청일전쟁의 서막.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확산 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동학농민군 진압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그해 6월 병력 1천500명을 성환에 주둔시키면서 동학농민군에 대응했다.

이에 일본은 1885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톈진조약'을 핑계로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톈진조약은 조선에 주둔했던 양국의 군대 철수, 파병 시에는 양국에 서면 통보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청과 일본은 충청도 풍도 앞바다에서 처음 충돌했다. 1894년 7월, 일본은 청군 군함, 운송선 등을 공격, 해상전을 승리했다. 육상에서도 청군에 대한 공격을 강행했다.

그 시작이 소사벌 전투(성환 전투)였다. 성 환 에서 진을 치고 있던 청나라 군대와 소사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싸움이었다. 일군은 새벽에 기습공격을 가해 청군을 몰아냈다.

이곳에서 청군이 망했다는 뜻에서 소사벌 평야를 이때부터 '청망평(淸亡坪)'이라 부르기도 했다.

평택/김종호기자 kikj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