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을 잊는다’ 태조 말에 이름된 곳

1933년 이태원공동묘지 개발하며 조성

유관순 열사 무연고 2만명 속할 가능성

안창호 누워있다 도산공원 옮겨간 역사

방정환·이중섭도 홍제동화장터 거쳐 와

 

이름 모르는 시민들도 묻힌 공동묘지

죽은 자 위에서 자란 나무… 곁에서 사색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사후 몸을 뉘일 자리로 낙점한 검암산 자락. 그 인근엔 거칠게 몰아쳐온 세계사적 파고에서 낡은 조선의 문을 닫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어온 인물들이 누워있다.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은 도산 안창호·만해 한용운·유관순 열사와 소파 방정환 등 독립지사가 나라잃은 민족의 처절한 삶을 웅변하고, 죽산 조봉암, 종두법의 지석영, 서양화가 이인성, 순조의 딸 명온공주, 한국인의 민예를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 등이 우리 근대사의 질곡을 들려주는 곳이다.

‘사색의 길’ 위에서 척박한 시대를 함께 살아낸 이들을 되돌이켜보면 그곳에서 ‘우리’를 만날 수 있다.

지난 1일 요란스레 비가 내린 날 오후, 조미선 구리시 문화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망우리역사문화공원 일부를 탐방했다.

조미선 구리시 문화해설사가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을 안내하고 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이 길은 성묘객을 위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일상에서 시민들이 산책로로 쓰고 있다. 망우리가 들려주는 얘기가 워낙 무게가 있어 ‘사색의길’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조미선 구리시 문화해설사가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을 안내하고 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이 길은 성묘객을 위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일상에서 시민들이 산책로로 쓰고 있다. 망우리가 들려주는 얘기가 워낙 무게가 있어 ‘사색의길’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망우리와 유관순

서남에서 동북으로 뻗은 아차산 자락은 워커힐 호텔께에서 시작해 경춘로까지 이어지고, 경춘로를 건너면 다시 검단산이 시작된다. 검단산 자락엔 동구릉이, 아차산 가장 북쪽엔 망우리공원이 있다.

망우리(忘憂里)는 ‘근심을 잊은 마을’이란 뜻이다. 태조가 자신의 선침 자리를 정하고 한양으로 가면서 ‘이제야 오랜 근심을 잊는구나’라고 말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영조 때 ‘망우동지’라는 책에서는 이곳을 “한양 인근 가운데 망우리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다”면서 지세를 높이평가한 기록도 있다.

사진 왼쪽에 이태원무연분묘합장비는 1936년 합장 당시 일제(경성부)가 세운 것이고, 사진 오른쪽의 낮고 반듯한 표지비는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백석대 유관순 연구소 등이 2018년 세운 것이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사진 왼쪽에 이태원무연분묘합장비는 1936년 합장 당시 일제(경성부)가 세운 것이고, 사진 오른쪽의 낮고 반듯한 표지비는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백석대 유관순 연구소 등이 2018년 세운 것이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망우리공동묘지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서울시의 인구폭발로 이태원공동묘지 등을 택지로 개발하기로 하면서 조성됐다.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이장하고 남은 2만8천기의 무연고묘. 일제는 1936년께 이를 모두 화장해 망우리공동묘지에 함께 이장했다. 작은 봉분과 이태원무연분묘합장비가 주목받은 것은, 유관순 열사가 이 ‘무연고’ 2만8천명에 속했을 가능성 때문이다.

유관순 열사는 1920년9월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해 이태원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매장됐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태원 묘지를 없애면서 열사의 묘도 찾을 수 없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부모를 잃고 오빠도 옥고를 치르는 등 가족이 풍비박산 나 이장을 담당할 가족이 없자 유 열사가 무연고묘에 합장된 것으로 강하게 추정하고 있다. 이에 2018년9월 유관순기념사업회가 새로 기념비를 세우고 때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서 행사를 하고 있다.

한편 서강대 뒤편에 있던 노고산공동묘지도 무연고 분묘를 합장해 망우리로 옮겼는데, 이를 알리는 비석에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글씨는 위창 오세창이 썼다. 오세창은 당대 최고 서예가이기자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 1인이다. 그 역시 망우리에 묻혀 있다.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위창 오세창의 글씨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위창 오세창의 글씨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도산 안창호·태허 유상규, 그리고 흥사단

도산은 ‘유상규 군 곁에 묻어다오’라는 자신의 유언대로 1938년 순국하자 망우리공동묘지, 태허 유상규의 묘 인근에 묻혔다. 태허는 도산의 애제자이면서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일 때 그의 비서이기도 했다. 도산을 따랐던 춘원 이광수는 유상규가 도산을 ‘아들모양으로 힘을 썼다’고 표현했다. 교육을 통한 민족혁신, 자아혁신, 인격혁신을 추구했던 도산의 뜻처럼 태허는 외과의사로서 보건위생 계몽에 힘썼다. 환자를 치료하던 중 세균에 감염돼 젊은 나이에 숨졌을 때 그의 스승 도산이 장례를 주도했고, 도산은 그로부터 2년 뒤 유상규의 곁에 묻혔다.

사제간 아름다운 우정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인해 갈라졌다. 박 전 대통령은 강남에 도산공원을 짓고 도산의 묘를 이장해갔다. 망우리에는 허묘를 세워뒀다. 그러나 다행히도 춘원 이광수가 짓고 원곡 김기승이 글을 쓴 비석을 춘원의 친일행적으로 인해 세우지 못하면서 2016년 비석이라도 원래자리로 돌아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일대에 그러한 도산의 정신을 따랐던 흥사단원이 함께 누워있다는 것이다. 도산의 묘 뒷편에 이영학, 그 인근에 도산의 조카사위 김봉성은 모두 흥사단원이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 일대를 ‘흥사단 공원’으로 조성하자고 주장한다. 도산과 그를 따랐던 흥사단의 철학과 정신을 되새겨볼만한 장소다.

도산 안창호의 허묘와 춘원 이광수가 짓고 원곡 김기승이 쓴 비석. 도산 묘 주위에 무궁화는 최근에 식재한 것으로 보인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도산 안창호의 허묘와 춘원 이광수가 짓고 원곡 김기승이 쓴 비석. 도산 묘 주위에 무궁화는 최근에 식재한 것으로 보인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만해 한용운과 소파 방정환

만해와 소파는 독립운동가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한편 ‘화장’을 택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지금은 매장보다 화장이 더 많은데, 그 화장문화가 도입된 것은 일제 때였다. 1902년 당시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 솔밭에 화장장이 처음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보다 대중화된 것은 1930년3월1일에 개장한 홍제동화장터다. 지금 고은초등학교가 있는 그 자리에 95년전에는 화구 17개가 있었다. 화장장에도 계층이 있다. 화력이 좋았던 5개는 부자들·일본인들이 썼고, 나머지 12개는 보통 사람들의 몫이었다. 방정환과 이중섭이 이 홍제동화장터를 거쳐 망우리공원으로 왔다.

다만 한용운은 화장을 했지만 홍제동이 아닌 미아리의 작은 화장터를 사용했다. 일제가 운영하는 홍제동 화장터가 철두철미했던 그에게 마땅치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해 한용운과 그의 부인이 만해의 흉상 뒤로 오른 산등성이에 모셔져 있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만해 한용운과 그의 부인이 만해의 흉상 뒤로 오른 산등성이에 모셔져 있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소파 방정환의 석묘 뒤에는 한글로 ‘동무들이’라고 표기돼 있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소파 방정환의 석묘 뒤에는 한글로 ‘동무들이’라고 표기돼 있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명온공주와 Smith

순조의 딸이자 고종의 고모인 명온공주가 부마 김현근과 함께 망우리공원 산기슭 작고 좁은 묫자리에 누워있다. 본래 고려대 앞 쪽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장돼 왔다고 한다.

그의 상석에는 영문이름이 깊게 패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차임태, 이덕진(?) 등의 이름과 함께 중앙에 스미스라는 이름이 대문짝만하다. 한 귀퉁이에는 태극무늬도 새겨져 있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후 벌어진 서울수복 전투 흔적이라고 한다. 아차산은 삼국시대에도 격전지였는데, 6·25 때도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명온공주와 김현근의 묘에는 그 상석에 깊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천상륙작전 뒤 망우리전투가 치열했다. 당시 피란을 미쳐 못간 주민 피해가 컸는데, 지게꾼들이 돈을 받고 시신을 망우리공원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명온공주와 김현근의 묘에는 그 상석에 깊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천상륙작전 뒤 망우리전투가 치열했다. 당시 피란을 미쳐 못간 주민 피해가 컸는데, 지게꾼들이 돈을 받고 시신을 망우리공원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2025.5.1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사색의 길’

1973년 만장된 망우리공동묘지의 모습이다. 녹음 가득한 지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국가기록원의 자료임이 사진에 박혀있다. /독자제공
1973년 만장된 망우리공동묘지의 모습이다. 녹음 가득한 지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국가기록원의 자료임이 사진에 박혀있다. /독자제공

“여기 이 나무들이 죽은 자 위에서 자랐어요. 우린 그곳에서 산책하고 있네요. 그래서 그런가봐요, 이 길을 사색의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망우리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시민들도 묻혀있다. 누군가는 자손이 번창해 묘소를 가꾸고, 누군가는 봉분이 평지가 될때까지 가꿔주는 이 없다. 보이지 않지만 조상의 묘조차 돌볼수 없는 이의 안타까움도 전하는 곳이 공동묘지다.

사색의 길 총 연장 4.7㎞. 독립영웅 뿐만 아니라 예술가, 운동선수, 극작가, 문인, 언론인 등 대한민국을 열어 젖힌 이들에게서 공동체의 역사를 찾고, 스러져가는 무덤 위에서 자란 숲이 겸손을 가르치는 곳. 망우리는 현충원보다 뜨겁고, 어떤 철학책보다 깊이있다.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