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인권운동서 피어난 ‘시각경보기’
생사와 직결된 사회적 인식 변화
전남 요양병원·밀양 병원 사고 등
제자리 머문 대피요령 ‘참사 반복’

2014년 5월 28일 전라남도 장성군 효사랑요양병원에서 21명이 사망하는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치매 환자의 방화로 건축물의 끄트머리 부근에서 발화한 것이 화재의 원인으로 밝혀졌다. 법령 미비로 해당 건축물에 스프링클러 설비가 없었고, 의료인력이 입원환자에 비해 부족해 피해를 키웠다. 전반적인 안전관리가 미흡했다.
이러한 지적에 따라 사고 후 면적에 상관없이 요양병원에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됐다. 또 층별 방화 구획된 대피공간 설치 등 법의 공백이 일부 메워졌다. 하지만 2018년 밀양 소재 세종병원에서 47명이 사망하고 112명이 부상을 입은 대형 참사가 반복됐다.
2024년 11월 11일에는 인천시 미추홀구 주상복합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 건물 4층에도 요양원이 있었다. 다행히 전원 대피가 가능했다. 하지만 인명 피해가 없었던 것은 화재 안전 법령이 강화된 것보다는 작은 화재 규모와 신고 접수 후 4분 만에 도착한 소방대원들 덕분이었다.
화재 시 거주자의 생존을 결정짓는 것은 건물 안에 머무는 시간이다. 이동이 곤란하거나, 대피 신호를 인지하는 것이 늦을 수밖에 없는 노인, 장애인이 화재에 취약한 이유다.
건물 안 복도 등에서 빨간 틀 안에 램프가 있고 ‘화재’ ‘시각경보장치’라는 문구가 적혀져 있는 작은 장치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장치는 ‘시각경보기’로 화재가 발생하면 강한 빛을 점멸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에게 시각적 자극으로 화재를 알리는 기능을 한다.
시각경보기가 발명되고 보급된 배경에는 장애인과 노약자의 생존권 보장과 관련해 우리가 한번 생각해볼 만한 시사점이 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장애인 권리 운동이 활발했다. 그 결과 오랜 시간에 걸쳐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부존재, 무관심, 동정에서 점진적으로 지지를 받기 시작해 대중적 공감으로 변화했다. 장애인의 권리 신장은 비용을 수반하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는 사회의 태도는 처음에는 동정, 시혜적 시선과 강한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장애인들의 힘겨운 투쟁과 시민사회의 지지 확산은 결국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사회, 경제, 문화적 삶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포괄적 장애인 인권법’(ADA)를 제정하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소방용품 제조업체 ‘스페이스 에이지 일렉트로닉스’에서 ‘AV32’라는 상품명으로 최초의 상업적 시각경보기를 출시했다. 이 장치는 화재로 인해 발신기가 동작하면 하부의 스피커에서 음향이 출력되고, 상부의 백열등 램프는 릴레이 회로로 점등과 소등을 반복해 건물 안에 있는 청각장애인에게 화재를 알렸다. 원리와 기능은 지금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각경보기는 미국에서는 1992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부터 법제화됐다.
얼마 전 사회 소외계층을 위한 대안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장애인과 고령자 등 자력 대피가 곤란한 이들이 알아야 할 대피 요령이나 매뉴얼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거주하는 ‘건축물과 장애의 유형과 정도, 거동의 수준이 다르므로 일반적인 대피 요령이나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은 곤란하다. 개별적 맞춤형 피난 대책이 사전에 준비돼야 하며 사회 구성원의 생존, 안전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 기능이니 이를 구성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다’라는 답변을 했다.
하지만 답변과 달리, 우리나라의 장애인, 노령자 등 취약계층에 대한 화재 안전의 현실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가장 큰 원인은 여전히 장애인과 노약자를 나와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는 데 머물러 있는, 분리된 사회적 인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노인이 되며 생애 중 장애를 입을 확률이 존재한다. 따라서 화재 취약계층은 결코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취약계층의 화재 위험이 남의 문제가 아닌 내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감이 사회의 바탕이 될 때 비로소 시각경보기와 같은, 보다 안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시도가 탄생할 수 있다.
/송병준 소방위 인천소방본부 영종소방서 용유119안전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