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세계는 남사당에 열광중… “내나이 78세, 신명은 계속됩니다”

 

인천 쑥골 태생, 아버지는 도화농악대 지동옥 명인 ‘끼 대물림’

멸시 받던 남사당패놀이, 현재 국가 보존 전통예술 격세지감

전세계 순회 ‘각광’… 고령 ‘저승패’ 불구 후학 양성 등 온힘

내달 7일 인천전통문화대축제 등 공연·예술 회고展도 기대

지난 21일 오후 인천 부평구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연습실에서 만난 지운하 보존회 이사장이 꽹과리를 치며 예인 70년의 이야기를 열고 있다. 2025.5.2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21일 오후 인천 부평구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연습실에서 만난 지운하 보존회 이사장이 꽹과리를 치며 예인 70년의 이야기를 열고 있다. 2025.5.2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위원회는 2009년 9일30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개최한 위원회 회의에서 남사당놀이, 강강술래를 비롯한 한국의 국가무형유산 5건을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남사당놀이의 산증인 지운하(78)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이사장은 그 감격의 순간을 이야기하면서 아직도 눈시울을 붉힌다. 남사당놀이의 세계무형유산 등재로부터 16년이 지난 올해가 지운하 이사장이 예인의 길을 걸은 지 꼭 70년 되는 해다. 그 70년은 지 이사장이 참외 껍질을 주워 먹으며 시작했던 남사당놀이가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까지 궤적과도 겹친다.

지난 21일 오후 인천 부평구 부개동에 있는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연습실에서 만난 지 이사장은 ‘예인 70년’을 되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남사당패는 최고 밑바닥이었어요. 어려서 남사당패에 있을 때는 배가 고프니까 칼로 채미(참외) 껍데기를 두껍게 벗기는 사람 옆에 있다가 땅에 떨어진 껍데기를 털어서 씹어 먹고 다녔어요. ‘광대 패거리다. 상놈들이나 하는 거다.’ 그런 소릴 듣던 남사당놀이로 이젠 외국에 나가 공연한 후 그 나라 대통령과 만찬을 하고, 청와대 가서 공연도 하고 그렇단 말이죠. 그 위치의 높낮이를 생각하면, 우리(남사당놀이)가 승리한 겁니다. 고통 없는 승리는 없다. 그런 생각이 요즘 들어요.”

남사당놀이는 남성들로 구성된 예인 집단 ‘남사당패’가 전국을 유랑하며 펼쳤던 전통 민속공연이다. 남사당패는 주로 마을이나 장터를 떠돌며 춤, 노래, 곡예 등을 공연했다. 이들은 볼거리가 없던 시대에 서민들에겐 환영받았지만, 지배 계층으로부터는 멸시를 당하며 갖은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남사당놀이는 전문 극단에 의해 ‘풍물’, ‘덧뵈기’(탈춤), ‘어름’(줄타기), ‘덜미’(인형극), ‘살판’(곡예), ‘버나’(쳇바퀴 묘기) 등 6개 장르로 구성된 전통 연희 공연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보존해야 할 전통 예술이자 문화유산이다.

지 이사장은 1947년 인천 쑥골(현 미추홀구 도화동)이란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화농악대를 이끌었던 지동옥(1911~1981) 명인이다. 지금이야 쑥골 일대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뒤덮인 도심으로 상전벽해가 됐지만, 지 이사장이 어릴 적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도화농악대는 1959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역량이 뛰어난 풍물패였다. 당시 12살에 불과했던 지 이사장도 도화농악대의 일원으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벅구(풍물놀이에서 쓰는 작은 북)를 쳤고, ‘개인 특상’을 수상했다. 지 이사장이 풍물에 입문한 건 숭의초등학교 2학년이던 1955년이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구구단을 외우라고 하는데, 교실 안 구구단 외우는 소리는 귀에 안 들리고 창밖 넘어 풍물소리만 또렷하게 들리는 거예요. 그 소릴 쫓아가 보니 아버지가 상쇠(우두머리)로 있는 풍물패가 있었죠. 장독가에 누군가 벗어 놓은 돌모(상모)를 머리에 쓰고 돌리니까 어른들이 ‘저 놈 배우면 잘하겠다’고 칭찬했죠.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너 진짜 잘한다’고도 했어요.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고 풍물패에 들어갔어요. 아버지가 충남 천안에서 박산옥 명인을 초대해 한 달에 쌀 한 가마를 주고 저와 동네 아이들에게 풍물을 가르치게 했어요.”

지난 21일 오후 인천 부평구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연습실에서 만난 지운하 보존회 이사장. 2025.5.2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21일 오후 인천 부평구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연습실에서 만난 지운하 보존회 이사장. 2025.5.2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전국 대회에서 입상한 지 이사장은 인천의 대표적 목재기업인 ‘대성목재’ 농악단으로 스카우트된다. 그가 13살 때다. TV조차 흔하지 않던 시절 농악은 동네마다 있었던 유일한 볼거리이자 즐길거리였다. 지 이사장은 “지금은 농악을 전통문화라고 하지만, 어릴 적에는 생활 예술이자 문화 활동이었다”고 했다.

대성목재 농악단에서 활약하던 지 이사장에게 남사당패 일원들이 함께 공연을 하자고 권유했다. 아버지가 남사당패 사람들과 함께 풍물을 치면서 이미 친분이 있었다. 지 이사장은 1960년대 중반부터 남사당패로 옮겨 전국을 떠돌며 공연 활동을 했다. 악극단, 여성 국극, 서커스, 약장사 등 안 서 본 무대가 없다. 집은 여전히 도화동이었지만, 남사당패로 한 번 나가면 몇 달 만에 집에 돌아오곤 했다.

“남사당은 전국 팔도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었어요. 전국의 풍물과 민속놀이의 하이라이트를 모아 하나의 판을 벌이는 게 남사당놀이고요. 당시 풍물하면 지운하를 알아줬습니다. 민속학자 심우성(1934~2018) 선생님의 권유로 국립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엔 국악예술학교에서 강사를 하라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장학생으로 공부하라는 얘기였어요.(웃음)”

군에 입대한 지 이사장은 1969년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군악대 소속이었지만, 잔혹한 전쟁터에선 보직이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전투에 투입됐다. 그 와중에도 지 이사장은 전투식량(C-ration) 상자를 장구통 삼아서, 판초 우의를 장구 가죽 삼아서 장구를 만들어 한국군과 미군 앞에서 공연을 했다. 상모는 철모 내피와 자전거 체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972년 지 이사장은 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일본 도쿄 고마극장에서 2개월 동안 열린 춘향전 공연에 참여했다. 이듬해 나고야, 오사카, 훗카이도까지 공연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지 이사장은 1970년대 다양한 공연이 열렸던 서울 워커힐호텔에 잠시 소속돼 국악 공연을 선보이다 1980년대 초까지 예술단과 함께 대만 등 해외 공연을 다녔다.

“1981년 ‘국풍 81’ 공연을 계기로 문화공보부 파견 예술단에 속해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스위스, 독일 등을 돌며 유럽 12개국 순회공연을 했어요. 미국 워싱턴에서도 무대에 올랐습니다. 1983년에 다시 워커힐로 들어가 사물놀이 단장으로 공연을 했습니다. 1999년까지 워커힐에 있으면서 참으로 많은 외국인이 제 공연을 관람하고 ‘원더풀’을 외쳤습니다. 남사당놀이도 계속했어요. 1981년 남사당놀이 이수자로 임명됐습니다.”

1999년 워커힐호텔에서 퇴임하고 국립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으로 선임된 지 이사장은 국악원 산하 민속단 단장으로 사물놀이를 지도하고 공연을 기획했다. 국립국악원에서도 역시 해외 공연을 이어갔다. 동포들이 사는 중국 동북 3성과 중앙아시아 등지에서도 활발하게 공연 활동을 했다. 지 이사장은 이 시기 국가무형유산 남사당놀이보존회의 주축이었다. 1995년 남사당놀이의 꼭두쇠라 할 수 있는 단장으로 선임됐다. 2007년 국립국악원에서 정년 퇴임한 이후 2011년 남사당놀이보존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국립국악원 지도위원 시절에는 중앙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으로 출강을 하니까 ‘교수님’ 소릴 들었습니다. 밑바닥 남사당패에서 국립국악원 지도위원과 교수님이 되니 대우가 달라진 거죠. 남사당놀이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겁니다.”

지난 21일 오후 인천 부평구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연습실에서 만난 지운하 보존회 이사장. 2025.5.2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21일 오후 인천 부평구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연습실에서 만난 지운하 보존회 이사장. 2025.5.2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긴 여정 끝에 고향 인천으로 돌아왔다. 지 이사장은 2011년 인천계양구립예술단 풍물단 창단을 주도하며 예술감독으로 활동했다.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를 이끌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기도 하다. 인천 시민들에게 전통 예술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선보이는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주최 ‘인천전통문화예술대축제’는 올해로 5회째를 맞는다. 내달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인천대공원 어울큰마당에서 열린다.

“남사당패에선 저처럼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고령이 되면 ‘저승패’라고 부릅니다. 공연은 하지 않아도 스승으로 깍듯이 대우해줘요. 그런데 저는 아직 저승패라고 하기엔 할 일이 많아요. 외국에서 최고로 각광받는 게 남사당놀이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선대 예인들의 전통 문화가 세계적으로 꽃피고 있잖아요. 70년 동안 걸어온 길, 앞으로도 계속 걷겠습니다.”

지 이사장은 올해 11월 서울 국립국악원에서, 12월 인천에서 각각 70주년 기념 공연과 함께 그의 예술 세계를 회고하는 전시를 개최할 계획이다. 70년 명인은 오늘도 다시 모래시계를 거꾸로 놓고선 길을 나선다.

■지운하 이사장은?

▲1947년 인천 도화동 출생

▲195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인특상

▲1961년 남사당놀이보존회 입단

▲1966년 국립 국악예술고등학교 졸업

▲1981년 국가무형유산 꼭두각시놀음(남사당놀이) 이수

▲1995년 남사당놀이보존회 단장

▲1999~200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

▲2011~2013년 남사당놀이보존회 이사장

▲2011~2017년 인천 계양구립풍물단 예술감독

▲현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이사장

/박경호·김용국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