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디자인 배운 소설가 후배 정성
소설·시나리오 쓰며 밤새웠던 시절
스프링제본기 샀던 대학 때 생각나
몇년전 고향집서 보내준 원고 사진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즐겁고 우스워


소설가 후배가 작품을 좀 읽어달라 청해왔다. 바쁜데…. 거절하고 싶었지만 실은 거절 같은 것 잘 못하는 사람이라 알겠다고 끄덕였다. 후배는 곧 이메일로 파일을 보내왔다. 열어보고선 화들짝 놀랐다. 워드 문서 따위 아닌 PDF 파일이었는데 얌전히, 보기 좋게 조판을 끝낸 편집디자인 완료물이었던 거다. 나는 읽기도 전에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편집까지 할 줄 아는 거였어?” 후배가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읽어봐달라고 부탁드리는데, 아무렇게나 드릴 수도 없고요… 편집이야 금방 배울 수 있는 거니까 배워두면 좋잖아요.” 후배의 정성이 예뻐서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펼쳤다.
몇 년 전 아버지가 고향집 수리를 하다 전화를 걸어왔다. “사진 몇 장 보냈는데 확인해 봐. 버릴 수가 없어서… 너희 집으로 보내줄까?” 아버지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나는 그만 까르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십대 시절, 그러니까 내가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던 때 썼던 원고 뭉치들이었다. 이 원고들이 고향집에 여태 있었다고? 그 시절 학교에서는 원고지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학과 사무실에는 언제나 원고지가 쌓여 있었고, 우리는 쓸 만큼 집어다 썼다. 나는 원고지를 사용하기 전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그러면 아버지가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철끈으로 단단히 매주었다. “1천매짜리 장편소설을 쓸 거야. 찢어버리는 것도 많을 테니까 넉넉하게 해 줘.” 아버지는 1천200매에서 1천300매쯤 되는 원고지 뭉치를 여러 개 만들어 주었다.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박스에 담겨 25년도 넘게 묵은 나의 글씨들엔 곰팡이가 피었고, 여기저기 번진 얼룩이 많았다. 나는 사진을 손가락으로 벌려 확대해 보다가 자지러질 뻔했다. 이 치기 어린 문장들이라니! 다음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가장자리가 나달나달해진 A4 원고 뭉치들. 얇은 작품은 스태플러로 찍혀 있었고, 두꺼운 작품은 역시나 철끈이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꾸만 사진을 확대해 문장들을 읽었다.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 다 불태워 버려야 할 것만 같았다. 부끄럽기 짝이 없었으나 즐겁고 우스웠다. “혹시 스프링제본 한 건 없어?” 아버지가 대답했다. “왜 없겠어?” 바로 사진이 날아왔다.
나는 소설도 썼지만 영화학과 부전공을 하며 한 달에 한 편씩은 시나리오를 써댔다. 무모할 만큼 밤을 새우던 시절이었다. 시나리오는 보통 A4지 100장을 훌쩍 넘겨서 스태플러로는 집히지도 않았고 커다란 집게로 집어놔야만 했는데, 그게 정말이지 불편했다. 그러면 학교 앞 복사집에 들러 스프링제본을 했다. 펀치로 원고에 구멍을 뚫고 스케치북처럼 뱅뱅 돌아가는 고리를 끼워 제본을 해주는 것이었다. 가격은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에게 용돈 받아 쓰는 학생 처지엔 비쌌다. 급기야 나는 스프링제본기를 아예 사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아마 그걸 사느라 나는 학식을 몇 번 건너뛰었을 것이고, 올 나간 스타킹을 새로 사지 않고 맨다리로 지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시나리오는 열다섯 편쯤 썼을 것이고, 물론 소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썼으니 그 스프링제본기는 본전을 뽑아도 확실히 뽑았을 테다. 나는 스프링제본을 한 시나리오를 거의 매달 영화사에 보냈고, 소설 공모전이 있을 때마다 노란 봉투에 넣은 다음 봉투 앞뒤로 입을 맞추고서 소설을 보냈다. 그런 나를 보며 단골 우체국 직원이 자주 웃었다. 스프링제본기 가격이 얼마였을까? 꽤 오래 고민을 하고 샀던 건데.
제본기는 살면서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영화를 포기했던 때였을까, 아니면 소설 공모전에 당선되었을 때였을까? 아버지는 내 원고 박스를 우리 집으로 보내주었다. 둘 데가 마땅찮아 도착하자마자 창고에 처박았으나 왠지 밥 몇 공기 더 먹은 것처럼 배부른 느낌이었다. 후배의 소설을 조심조심 읽었다. 더 잘 읽어달라고 편집디자인을 배운 후배가, 더 잘 읽어달라고 스프링제본기를 냅다 산 나 같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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