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따리’에 담긴 말의 씨앗, 민족의 숨 틔우다

 

체계적인 최초의 국어문법 이론서

품사·문법·문장 분석방법 등 제시

독창적 관점으로 후속연구 밑거름

한국근대문학관이 소장한 주시경 ‘국어문법’ 표지. 가로 15.5㎝, 세로 22.5㎝ 크기의 118쪽짜리 책이다. 2025.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한국근대문학관이 소장한 주시경 ‘국어문법’ 표지. 가로 15.5㎝, 세로 22.5㎝ 크기의 118쪽짜리 책이다. 2025.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세종 임금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셨으나 주시경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한글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0년 한글학회에서 국어학자 한결 김윤경(1894~1969)이 엮어낸 책을 2016년 열화당에서 되펴낸 ‘주시경 선생 전기’의 서문 첫 문장이다.

이 말 그대로 한힌샘 주시경(1876~1914)은 개화기 이후 최초이자 대표적 국어학자로서 우리말 연구의 주춧돌을 놓았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 내어 일제강점기 속에도 우리말의 명맥을 잇게 했다. 김윤경도 주시경의 제자다.

주시경이 한일 강제 병합 직전인 1910년 4월15일 박문서관에서 펴낸 ‘국어문법’(國語文法)은 국어학의 역사측면에서 체계적으로 쓰인 최초의 국어문법 이론서다. 주시경은 1893년부터 연구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8월29일 이후 ‘조선어문법’으로 제목을 바꿔 1911년 12월29일과 1913년 9월27일 두 차례에 걸쳐 다시 발행됐다. 식민지화를 반영한 ‘조선’이 아닌 우리나라의 말을 뜻하는 ‘국어’(國語)란 제목을 달았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출판된 ‘조선어문법’은 현재 많이 남아있으나, ‘국어문법’은 희귀본 중 희귀본이라고 한국근대문학관은 설명했다.

개화기인 20세기 초 근대적 한국어 연구는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1859~1916) 등 서양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졌다. 이 시기 주시경은 독자적 관점에서 우리말을 연구한 선구자였다. 그 연구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국어문법’이다. 선생은 이 책에서 품사나 문장 분석 등을 다룬다. 이 책을 통해 ‘움’(동사), ‘엇’(형용사), ‘임이’(주어) 등과 같은 새로운 문법 용어를 만들어 썼고, 독창적 문장 분석 방법을 제시했다.

한국근대문학관이 소장한 주시경 ‘국어문법’ 가운데 그림풀이로 문장을 분석한 부분. 2025.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한국근대문학관이 소장한 주시경 ‘국어문법’ 가운데 그림풀이로 문장을 분석한 부분. 2025.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한국근대문학관 컬렉션’의 이번 ‘국어문법’ 편에 전반적인 도움말을 준 송정근 국립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당시 우리말 연구가 서양의 근대적 연구에 기반하고 있었을 것이나 주시경 선생은 서양 학문의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말을 설명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며 “이러한 독창적 관점이나 시도 자체가 이후 우리말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큰 보따리에 교재를 싸매고 많은 학교를 돌며 학생들을 가르친 주시경의 별명은 ‘주보따리’였다고 한다. ‘국어문법’ 역시 주시경의 중요한 교재로 그 보따리 속에 들어있었을 것이다.

주시경으로부터 굵직한 국어학자들이 배출됐다. 해방 전 주시경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우리말 연구단체 ‘조선어학회’는 ‘조선어 맞춤법 통일안’(1933)을 만들었다. 이는 해방 이후 남북의 공통된 맞춤법의 근간이 됐다. 남한에선 최현배(1894~1970)가, 북한에선 김두봉(1889~?)이 각각 우리말 연구의 중심 역할을 했는데, 이들 모두 주시경의 수제자다.

여담으로 ‘주시경 선생 전기’를 보면, 선생은 1900년 6월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관립 인천 이운학교에서 항해술을, 서울 수진동 흥화학교에서 측량술을, 이화학당의 영국인 의학박사에게 영어와 의학을 배웠다고 한다. 여기서 ‘관립 인천 이운학교’란 자주적인 해운업 활동을 위해 1893년 인천(제물포)에 창설된 관영기업 ‘이운사(利運社)’ 혹은 그 회사에서 운영한 교육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