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부실대응이 불러온 참극… 초기 위험 신호 모두 놓쳤다
접근금지 명령 불구 前 연인 납치·살해
폭행·협박 등 피해사실 증거 제출에도
단순 교제폭력 분류·긴급임시조치 지연
경찰, 초기 대응 문제점 인정 감찰 진행
전문가들도 현행 법 체계 미비점 지적

동탄에서 30대 여성이 교제하던 남성에게 지난 12일 오전 납치 살해됐다. 남성은 이미 여성을 폭행해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살해 당하기 한 달여 전 여성은 폭행·강요·협박 등 그동안의 피해사실을 모아 경찰에 남성을 구속 수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여성이 피해사실 녹취를 포함해 고소장, 고소이유보충서 등 경찰에 낸 처벌의견서 분량만 600쪽이 넘는다. 그러나 남성은 구속되지 않았고, 여성을 찾아 살해한 뒤 자살했다.

“보복이 두려워 그동안 신고를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저의 상처로만 끝날 수 있도록, 제2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부디 강력히 처벌해 가해자가 다시는 법을 쉽게 보지 못하도록 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처벌의견서 中 피해자 진술)
화성동탄경찰서에 지난 4월 4일 ‘동탄 납치 살인’ 가해 남성 30대 A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보복협박, 성매매 강요, 특수강요, 상해, 특수협박 등의 9가지 혐의로 처벌해 달라는 고소장이 접수됐다. 이미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피해 여성 B씨가 추가 피해 우려를 호소하며 낸 것이다. 이어 같은 달 17일 B씨의 법률대리인은 A씨의 구속과 통신기기 등의 압수수색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내용의 보충의견서를 경찰에 추가로 제출했다.
29일 경인일보가 확보한 고소장과 녹취 사실, B씨 유족 측 설명을 종합하면 A씨의 폭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2020년 말쯤으로 보인다. 일로 만난 둘은 2017년 교제하며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B씨는 고소 자료에 대한 구술 문답 과정에서 법률대리인에게 “2020년 12월 외출 과정에서 차 안에서 손바닥으로 머리를 맞았다”며 “그 이후로 A씨의 폭행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신체 폭행과 함께 A씨가 B씨를 정신적으로 괴롭히고 지배하려던 정황도 곳곳에 남아 있다. B씨는 고소장에 “A씨가 전세사기를 지시한 대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돈을 벌어오지 않으면 나를 죽이거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할 것처럼 협박했다”고 적었으며, “성매매를 해 돈을 벌어오라고 요구했다”고 적었다. B씨는 실제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2023년 공인중개사 1, 2차 시험에 모두 합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B씨는 A씨의 요구를 이행하지 않았다. B씨는 어느날 이 같은 위협이 이어지자 A씨에게 “사기 외에는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B씨가 고소장에 A씨의 보복협박 혐의를 담은 것을 보면, 피해사실을 밝히기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B씨는 고소를 통해 “A씨가 다시 경찰에 신고하면 법원에서 마주치거나 나의 집 앞에서 마주칠 때 죽일 것이다. 재판 결과 불구속이면 죽일 것이다”라는 취지로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난해 9월 B씨가 ‘A씨가 유리컵을 던지며 폭행했다’는 내용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을 두고 A씨가 한 말이다. 이어 이 사건으로 A씨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자 지난 2월 다시 한번 가족의 신변을 위협하고 자신을 수차례 폭행했다는 내용을 고소장에 적시했다.
하지만 A씨의 갖가지 범죄 혐의가 담긴 고소장마저도 B씨의 피해사실 전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B씨는 A씨의 폭행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지난해 2월 4일부터 A씨의 범행을 녹음했다. B씨는 법률대리인 측에 “헤어져야겠다 생각해서 지속적으로 말을 했는데 A씨가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폭행 빈도가 늘어 몸을 다치는 일이 많아졌다”며 “녹음으로 증거를 수집하면 피해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피해사실을 겨우 기록하기 시작한 이유를 밝혔다.
B씨는 A씨가 폭언을 가하며 흉기를 집어들고 위협하는 소리, 폭행을 당한 후 갈비뼈와 이가 부러지고 몸 여기저기가 멍든 내용의 병원 진단 기록과 사진도 증거로 남겼다.

고소장을 접수한 경찰은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A씨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신청을 검토했으나 실제 신병 확보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고소장 제출 40여 일이 지난 5월 12일 A씨는 B씨의 거처를 알아낸 뒤 찾아 납치 살해했다. A씨는 이미 B씨를 때려 접근금지 등 긴급임시조치로 분리됐으나 이를 어기고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질렀다.
B씨의 고소 사건을 법률대리한 손우창 변호사는 “고소장이 접수되면 피의자인 A씨가 고소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최대한 신속히 구속 수사가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경찰에서 사실관계 파악과 증거 확보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녹취를 푼 녹취록을 작성했고, 피해 내용을 문답형 진술서로 만들어냈다. 구속영장 신청에 반영될 내용을 모두 준비했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A씨의 인신구속이 필요했던 건 그가 B씨를 찾아 보복하려는 움직임을 지속해 보였기 때문이다. 손 변호사는 “피해자 상담 초기에는 폭행·상해 정도 피해를 받은 걸로 알고 있었지만, 녹취를 본 결과 실상은 훨씬 더 처참하고 끔찍했다”며 “가해자가 임시조치 기간 중에도 B씨 친구를 통해 연락을 시도하고, B씨 지인에게 협박성 메시지로 흥신소를 고용했다고까지 언급했기 때문에 신속한 구속 수사 외에는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경찰이 A씨에 대한 구속 수사를 미룬 것과 더불어 과거 B씨의 세 차례 폭력 피해 신고 때 초동 대응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이 경기남부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경찰은 B씨가 지난해 9월 9일, 올해 2월 23일, 올해 3월 3일 등 세 차례에 걸쳐 A씨를 신고한 사건 가운데 앞서 두 차례 신고를 가정폭력이 아닌 교제폭력 신고로 판단했다.
첫 번째 신고 당시 현장 사건 처리 과정에서 경찰이 ‘피해자와 피의자가 동거하는 연인 사이’라는 점을 파악했음에도 단순 교제폭력으로 판단해 현장에서 긴급임시조치 판단조사표를 작성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 신고에서 현장 경찰관이 B씨의 ‘A씨와 이미 화해를 했다’는 표면적인 진술을 듣고 사건을 종결하고 돌아가자 A씨는 B씨에게 폭행 등 고문에 가까운 가혹행위를 벌이기도 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오랜 동거 관계였지만 가정폭력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사실상 경고 조치로 종결한 것을 두고 초기 대응부터 적절치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은 지난 3월 세 번째 신고에서야 가정폭력 사건으로 판단하고 A씨에 대한 긴급임시조치를 진행했다. 보다 면밀한 관찰 대상인 ‘가정폭력 재발 우려 가정’으로 지정된 것도 세 번째 신고 이후였다.
용혜인 의원은 “경찰은 지난해 교제폭력 관련 매뉴얼을 제작해 사실혼 해당 시에 긴급임시조치를 적용할 것을 명시했으나 이번 사건 초기 그와 같은 대응을 하지 않았다”며 “임시조치를 이른 시기에 적용했다면 위반 시에 유치장 유치를 신청할 수 있는 등 보다 적극적인 가해자 제재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화성동탄경찰서 관계자는 당시 신고 사건 분류 등 초기 대응과 관련해 “가정폭력처벌법상의 관련 조치가 진행됐어야 하는데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교제폭력으로 1차 사건을 접수했다 하더라도 담당 기능 수사관이 가정폭력 사건으로 내용을 변경할 수 있는데 그런 조치도 없었다.
경기남부경찰청 수사과는 ‘동탄 납치 살인 사건’과 관련된 화성동탄경찰서의 수사 과정 전반에 대한 감찰을 진행 중이다. 감찰을 통해 담당 경찰관의 부실 대응과 수사상 문제가 드러날 경우 이에 합당한 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이다. 강은미 화성동탄경찰서장은 지난 28일 경기남부청에서 브리핑을 열고 책임자로서 이 사건 전반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유가족에게 사과했다.

국회의 입법 노력 부재, 경찰의 부실 대응이 맞물린 참극이라고 전문가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피해자가 3월 세 번째 신고와 고소장을 통해 A씨 인신을 구속해달라고 경찰에 호소했지만 경찰은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국회에는 체포 명분이 부족하고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 부실한 지금의 법 체계를 방치한 책임이 있다”며 “경찰 초동대응 전반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고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망사건의 원인을 국가가 총체적으로 되짚는 ‘사망검토제’를 속히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측도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한 재발방지책 마련을 촉구했다. B씨 유족 측은 “숨쉬기 힘들 정도로 하루하루 견디기 어렵지만 똑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수사기관의 대응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계속해서 밝히려고 한다”며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법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게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