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경찰의 사과, 큰 의미없어”

 

죽은 아이 살아돌아올 수 없지만 딸 이름 용기내 밝히는건 억울함 풀어주고자

지속 폭행 못견뎌 거처 옮겼다는 사실 듣고 악행 알게돼… 고소 준비하던 시기

600장 넘는 진술서·고소장 제출했지만, 경찰 구속없이 안일한 대응 이해못해

교제하던 남성으로부터 폭행과 협박 등에 시달리다 경찰에 지속적인 보호조치를 요청한 김은진씨는 결국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지난 5월 12일 살해됐다. 김씨의 어머니는 인터뷰 도중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2025.5.30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교제하던 남성으로부터 폭행과 협박 등에 시달리다 경찰에 지속적인 보호조치를 요청한 김은진씨는 결국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지난 5월 12일 살해됐다. 김씨의 어머니는 인터뷰 도중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2025.5.30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열 아들 안 부럽다”며 주위에 자랑하던 딸이었다. 직장을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을 집안일에 보태라며 보내주던 딸이었다. 엄마는 이 집을 둘러보며 딸아이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리가 없다고 했다. 딸은 다른 집에 나가 살 때에도 자주 집을 찾아 음식을 손수 차려놓고 엄마를 기다렸다. 그런 딸이 긴 시간 교제하던 30대 남성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지난달 12일 남성은 화성 동탄의 여성 은신처를 알아낸 뒤 과거 동거했던 아파트로 납치해와 흉기로 살해했다. 가해자는 이미 여성을 상습적으로 폭행해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여성은 이 남성이 어떻게든 보복할 게 두려워 추가 피해 사실을 모아 경찰에 구속 수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경찰은 한 달이 넘도록 피해자 호소를 외면했고, 그 사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은진씨의 어머니와 동생이 거주하는 집 한편에 가족사진이 붙어있다. 2025.5.30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은진씨의 어머니와 동생이 거주하는 집 한편에 가족사진이 붙어있다. 2025.5.30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김은진(32). 엄마는 이제 딸의 육성을 들을 수 없는 대신, 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 더 많이 부르기로 했다.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딸의 이름을 용기 내 밝히는 건 죽음의 억울함이라도 풀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은진씨의 엄마는 ‘아이가 사망했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어 “무슨 소리냐”고 소리치며 반문했다고 한다. 떨어져 살면서도 집을 자주 찾아왔고, 찾아올 때면 힘든 내색을 얼굴빛으로 잘 드러내지 않던 딸이었다. 엄마는 경인일보와 만나 “병원에 (시신이) 있다고 처음 얘기를 들었다”면서 “딸아이가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엄마로서 아픔의 깊이를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들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흐느꼈다.

엄마는 은진씨가 교제하던 남성 이모씨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지난해 11월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엄마가 이씨를 실제 처음 대면한 날이었다. 딸은 그날 자살 시도를 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병원에 달려간 엄마는 딸과 이씨 사이에 다툼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고 한다. 엄마는 “그리 춥지도 않은 11월 날씨였는데, 이씨가 털 달린 겨울용 파카를 은진이 입을 옷으로 가져왔길래 ‘같이 살면서 이럴 수 있나’ 생각하며 행동이 의아하기도 했다”면서도 “이씨가 함께 슬퍼하기도 해 큰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고 넘겼는데, 지금 돌아보면 다 연기를 한 거였다”고 했다.

올해 3월, 엄마는 은진씨가 이씨의 지속적 폭행을 견디지 못해 거처를 옮겨 생활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씨의 악행을 본격적으로 알게 됐다. 은진씨가 이씨로부터 당한 추가 피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보복 위험을 무릅쓰고 피해 증거자료를 모아 고소를 준비하던 시기다. 실제 은진씨가 고소장과 엮어낸 피해 녹취를 보면 이씨의 폭행 등 범죄는 지난해 8월부터 분리조치가 이뤄지기 직전인 올해 3월까지에 집중돼 있다. 엄마는 “딸아이가 그 시기 집에 오면 피곤한 모습으로 오랜 시간 잠만 잤다”며 “돌이켜보면 잠을 안 재우고 이씨에게 밤새 맞아서 힘이 다 빠진 채 와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가 폭행뿐 아니라 보복협박, 전세사기·성매매 강요 등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이씨의 갖가지 범죄 혐의를 알게 된 건 은진씨의 사망 이후다. 엄마는 딸의 지옥같은 아픔을 죽음 뒤에 알게 된 것이 크게 가슴에 사무친다고 했다. 엄마는 “600장 넘는 진술서와 고소장 세부 내용은 딸이 죽고 나서 봤는데, 아마 미리 알았으면 딸을 이렇게 방치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울분에 말끝을 흐리면서도 “진실을 밝히려면 알아야 하니까 힘든 상황이었지만 새벽 내내 끊어서 끊어서 힘겹게 읽어 내려갔다”고 말했다.

은진씨 가족들은 무엇보다 경찰 대응에 통탄해하고 있다. 은진씨가 여러 차례 신고한 내용, 나아가 법률 대리인까지 구해 고소장과 고소이유보충서 등을 써서 도움을 구한 사실이 있었음에도 경찰이 이씨에 대한 구속수사 없이 안일하게 대응했다는 점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엄마는 “고소 내용을 그렇게 디테일하게 적어냈으면 누구나 1시간만 읽어봐도 위중한 사건인지 알 수 있는데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았다”며 “은진이가 이씨로부터 위치가 발각된 것 같다며 보호조치와 구속 수사를 지속적으로 요청했는데도 경찰은 움직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경찰이 수사와 피해자 보호에 수수방관한 사이, 피해자는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몸을 숨긴 채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엄마는 “3월 신고 이후 경찰이 안내한 임시 숙소에 별다른 안전장치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보복을 걱정한 딸은 스스로 은신할 장소를 구해야 했고,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도 두려움에 자비를 들여 사설 경호를 붙였다”며 “오히려 그 사이 가해자 가족이 집에 찾아와 고소를 취하해달라며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은진씨가 두려움에 떨면서도, 고소장을 준비하며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으려 애쓴 모습을 보인 점은 유가족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엄마는 딸이 지난해 출구 없는 고통을 호소하며 삶의 의지가 많이 꺾여 있던 데 반해, 올해 변호사를 만나면서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엄마는 “마음 약하게 먹지 말자고 다독이니, 삶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보였었다”며 “그런 상황에서 (살해를) 당해 너무 안타깝다”고 울먹였다.

은진씨의 유가족은 삶을 포기하려던 아이가 살아가려는 의지를 회복한 상황에서 결국 살해됐다며 안타까워했다. 2025.5.30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은진씨의 유가족은 삶을 포기하려던 아이가 살아가려는 의지를 회복한 상황에서 결국 살해됐다며 안타까워했다. 2025.5.30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화성동탄경찰서는 은진씨가 사망한 사건과 관련 수사와 피해자 보호 전반에 미흡했던 점을 인정하고 지난달 28일 공식 사과했다. 강은미 화성동탄서장은 경기남부경찰청에서 열린 브리핑을 통해 “유명을 달리하신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올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경기남부청은 현재 경찰관의 부실 대응 등 수사상 문제가 있었는지 감찰 중이며, 결과가 나오는 대로 합당한 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이다.

유가족들은 철저하고 투명한 진상규명 요구와 함께 은진씨와 같은 피해사례가 나오지 않게 경찰뿐 아니라 국가기관 전반을 향해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은진씨 엄마는 “사과는 지금도 가족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잘못한 점이 드러나 처벌받아야 할 사람은 처벌받아야 하고, 아직도 피해자를 지키지 못하는 법은 계속해서 바뀌어 나가야 한다”며 “그래야 너무 억울하게 죽은 아이를 그나마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고, 같은 죽음의 발생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