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능침(건원릉)으로 선정된 구리시 일대는 그보다 앞선 삼국시대엔 한성을 차지하기 위한 군사전략적 요충지였다.
구리시와 서울 광진구에 걸쳐 있는 아차산은 해발고도가 295.7m에 불과하다. 산 아래에서 보면 동네 뒷산일 뿐이지만, 이 야트막한 바위산을 올라가 보면 그 산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바로 깨닫게 된다.
북으로는 왕숙천을 낀 남양주와 남으로는 몽촌토성 등 잠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남산은 물론 인왕산까지도 둘러보인다. 이 산에서 수도 서울을 조망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산에는 백제가 축조해 삼국이 모두 쓴 아차산성과 산 정상을 평탄화해 일개 중대를 주둔시킨 고구려의 보루 20여기가 있다.

아차산 일대 보루는 1994년께 지표조사를 통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보다 전체적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 것은 1997년이었다. 여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위산 꼭대기의 이례적으로 넓은 평탄한 땅은 별다른 단서 없이 헬기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당시 헬기의 강한 바람 때문에 깎여나간 흙에서 사람 손이 닿은 돌이 발견되면서 제4보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1년간 진행된 발굴조사로 둘레 210m가량의 성벽과 치, 7기의 건물지와 간이대장간 시설이 확인됐다. 온돌구조의 건물이었고, 물을 저장하기 위한 저수조도 2개 발견됐다. 복발형 투구, 철기류, 토기류도 다수 발견됐다. 특히 간이대장간이 발견된 점이 주목받았다. 이 유물들은 아차산 밑 ‘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이하 유적전시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천500년의 시공을 박차고 나온 유물들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보루란 적을 막거나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요새다. 4보루 규모라면 약 100여명까지 생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적전시관은 보루 축조 과정 모식도에서 산꼭대기에 이 시설을 만들기 위해 비탈면에 흙을 채웠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화살촉, 투겁창, 철제 조각에 구멍을 뚫어 이은 투구 등 무기뿐만 아니라 오늘날 쟁기같은 역할을 하는 보습, 나무 삽 주변을 철로 감쌌던 삽날 등 농기구류, 띠고리 등 의복 일부가 철제 형태로 나와 철기가 널리 활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대장간이 보루에서 발견돼 현장에서 이것들을 수리해 썼음도 짐작할 수 있다.
아차산 정상인 제3보루와 4보루는 매우 가까운데, 3보루에서는 우리가 아는 형식의 디딜방아가 확인됐다. 이에 학자들은 “이들 보루에 주둔한 고구려군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출토된 철제농공구들은 이들이 평상시에는 농사와 같은 생업에도 종사하였다”고 유추하고 있다.

아차산 보루는 군사요새인 만큼 고구려의 한강유역 진출 및 경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구려 남진정책의 실제 증거물인 셈이다.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 개로왕을 아차산성(아단성)에서 죽여 한성백제 시대를 끝냈다고 돼 있다. 이후 고구려가 백제 도성인 몽촌토성을 차지해 쓰기 시작하는데, 그 이후에 보루를 축조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이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는 “아차산은 그 지리적 위치가 한강 상류에서 하류지역으로 오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며, 중랑천과 왕숙천변을 방어하기에 적합한 위치”인데다 “몽촌토성 고구려 유적은 500년 이전, 아차산 유적은 500년 이후로 편년되고 있어 아차산 보루의 사용시기와 기능은 한강유역과 중랑천변에 대한 방어적 기능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구리문화 2008년 16호 ‘아차산 고구려 보루 발굴 10년’에 적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아차산을 차지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백제 무령왕대(501년~523년)와 성왕대(523년~554년)에 고구려와 백제 사이 한강유역 일대 국경선이 승패에 따라 변했지만 문헌은 ‘551년에 와서 한성을 회복하고 평양지역을 획득했다’고 하고 있어 대략 50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551년까지 아차산이 고구려 관할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은 ‘진심’(?)이 담겼다. 최종택 교수는 같은 글에서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방식에 논란이 많다”면서도 “고구려가 이 지역을 하부(下部)로 통괄했을 가능성이 크고 하부의 하위조직으로 행정구획을 했을 것”이라고 봤다. 공격하고 돌아갔던 광개토대왕과는 달리 장수왕이 몽촌토성을 점령한 후에는 의례용 토기가 출토돼 상당한 신분의 지휘관이 주둔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몽촌토성이 (남진정책의) 거점성 기능을 했을 것”이라고도 봤다. 용인에서 발견된 고구려 고분 역시 이와 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아차산이 전해주는 1천500년 전의 역사를 전하기 위해 구리시는 아차산 입구에 ‘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과 함께 ‘고구려 대장간 마을’을 조성했다. 전시관이 유물을 보여준다면, 고구려 대장간 마을은 상상 속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다.
때마침 촬영하던 드라마 ‘태왕사신기’가 여기서 촬영을 했고, 주인공 역을 맡았던 배우 배용준이 아차산에서 ‘큰바위얼굴’을 처음 발견하기도 했다. 이후 드라마 촬영이 이어져 ‘환혼’이 마지막 드라마였다.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