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8 청관거리와 중국요리-上>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는 지금도 청관(淸@)거리로 불린다.
「청관」이란 공식지명이 아니라 구한말 우리나라 사람들이 청국 조계(租界·19세기 후반 중국과 한국 등에 형성됐던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
외국인이 거주하면서 상업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기도 했다)를 통칭하던 말. 그러나 조계가 폐지되고 나서도 이 명칭은 계속 사용됐다.
인천에 청관이 들어선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고종 21년(1884년) 조선의 종주국(宗主國)을 자처하던 청국은 일본이 자기네보다 먼저 우리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조계를 설정하자 서둘러 뒤따랐다.
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청국은 선린동(善隣이란 이름도 이웃나라와 친선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지었다) 일대 5천여평을 조계로 정했다.
청국은 여기에 영사를 설치하고 인근에 화교들이 소매잡화점포와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이후 화교 상인들이 몰려들자 조계를 확장하는 등 상권을 본격적으로 형성했고, 사람들은 이 곳을 청관이라 불렀다.
그러다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국력이 쇠퇴해지자 사람들은 화교를 비하하는 명칭으로 쓰기도 했다.
「인천 한세기」의 저자 愼台範씨(88)에 따르면 청국지계는 현 중앙동과 선린동 사이에 있는 옛 중화루를 거쳐 자유공원 한국회관 앞 언덕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두 개의 큰 길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그리고 지금의 舊 북성동 사무소가 있는 큰 길이 중심지 구실을 했고, 이 길을 따라 「同順泰」를 비롯 「仁合東」, 「東和昌」 등 청국 거상들이 운영하는 큰 점포가 즐비하게 늘어섰다고 한다.
청관 일대 점포들은 도로변에서는 2층으로 보이지만 대개 벼랑에 붙여 지은 것이어서 해안 쪽에서 바라보면 5~6층 짜리 건물처럼 보였다.
愼씨는 『청관거리가 형성될 무렵엔, 지금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어 없어진 존스톤 별장, 영국 영사관, 세창양행 기숙사 등 우아한 양식 건물과 조화를 이뤄 항구 쪽에서 바라보면 한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중국에서 건너 온 화교 1세들은 고유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관거리엔 볼거리가 많았다.
중국에서 큰 명절의 하나인 설날 제야놀이부터 시작해 원소절(元宵節)이라 불리는 대보름날에 끝나는 春節 15일 동안 청관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집집마다 복을 기원하는 글을 빨간 종이에 써서 붙이고 색등을 걸었으며, 해가 저물면 긴 장대 끝에 폭죽을 수백개씩 달아 놓고 불꽃놀이를 즐겼다.
50년대 까지만 해도 이런 광경은 흔했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자취마저 사라진 상태다.
또 청관에 있던 중국 절에서는 노덕술관장이 중국 전통무술인 18기를 가르쳐 화교들은 물론 인천지역 무인들도 자주 찾았다.
장례식 때 종이로 만든 인형을 태우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색다른 모습이었다.
화교들은 죽으면 대부분 현 시립 인천대학교 일대 산에 묻어 중국인 묘지군을 이루기도 했다.
그 무렵 인천의 화교들 역시 여느 화교들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상술을 발휘했는 데, 1930년대 초 까지만 해도 10여개 대화상들이 중국 산동성 지역에서 소금과 각종 곡물을 들여왔다.
한염해운의 전용두부(지금의 인천역 일대)였던 염부두 앞 바다에는 독특한 꼴을 한 검은색 중국 풍선(風船)이 호염(胡鹽)이라 불리던 천일염을 비롯 고추, 잡곡, 지물류를 싣고 들어왔다.
아울러 인천에선 건어물과 해삼, 새웃살, 조갯살 등 해산물을 갖고 나갔다.
이때 화교 인구가 30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화교들이 얼마나 번창했는 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청관의 상권은 거의 마비되고 일부 요리집과 잡화상들만 남았다.
전쟁 직후 일제에 의해 활동을 제약받던 20대 젊은 화교들은 대만이나 미국,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남은 화교들은 중국음식점과 잡화상을 운영하거나 지금의 남구 주안·도화동 일대에서 비교적 큰 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살림이 어려웠던 일부 화교들은 일제가 축항을 건설하면서 부두 근로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20년대 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청관거리는 청요리로 명성을 떨쳤다.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송죽루) 등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3대 요리집」으로 통했다.
지금은 장사를 하지 않지만 공화춘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어 이를 보는 나이 지긋한 인천인들을 추억에 잠기게 한다.
현재 터만 남아 있는 중화루는 청관을 대표하는 4층 건물로서 이후 대불호텔로 이름을 바꿔 운영되다 헐렸다.
인천지방경찰청 인근 기독교백주년기념탑 맞은 편에 위치했던 송죽루는 동양석유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청관거리엔 현재 1백70여가구 5백여명의 화교들이인천이야기-8>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8]청관거리와 중국요리(上)
입력 1999-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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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5-2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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