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동물은 목적에 따라 이동하게 마련이다. 특히 인간의 이동은 그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 스스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면 그 시대에 알맞은 사회현상을 읽을 수 있다.

지난 40여년 동안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 뚜렷한 이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농경중심 사회에서 공업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화하면서, 누구나 빈곤했던 사회에서 풍요로움을 얻기까지 우리 민족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터전을 옮겨다녔다.

40여년 동안 한반도에서 진행돼온 이주의 역사를 통해 당시의 사회현상을 돌이켜 보며 우리의 삶과 가치관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조명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60년대 - 외국만이 살길

65년 노동청의 파독 광원 모집광고. 지난 58년 김포 국제공항이 문을 연뒤 10여년 동안 주 이용객은 서독으로 떠나던 광부와 간호원, 주한 미군이었다.

지난 63년 12월 75명이 광부로 간 것을 시작으로 77년까지 모두 7천936명의 광부와 1만32명의 간호사가 서독으로 파견됐다.

당시 엄격한 신체검사를 거쳐 서독으로 파견된 우리 근로자들은 비록 광부와 간호원으로 서독인들이 기피하는 일을 하기 위해 떠났지만 이들 대부분이 당시에는 드물게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었다.

경제적 기반이 거의 전무한 상태라 아무리 명문 대학을 나와도 마땅한 취직 자리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 당시 우리의 현실이었다.

“별짓을 다했어요. 손이 고와서는 안되기 때문에 틈만 나면 손을 연탄에 부벼댔지요. 몸무게가 신체검사 조건(55㎏)에 못미쳐 밤새 물을 들이켰고 바지 주머니에 돌덩이와 납을 넣은 채 체중계에 올라 겨우 합격했습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3년중퇴한뒤 지난 65년 서독에 광부로 파견됐다 정착한뒤 26년만인 지난해 12월 대한적십자사의 초청으로 고국을 찾은 김공부(67) 할아버지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서독행 비행기를 타려했던 사연이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해준다.

#70년대 - 도시에서의 공장생활과 중동특수

경공업중심에서 수출위주의 중공업중심으로 경제정책이 바뀌면서 전국 각지에 공단이 생겨난 것이 바로 70년대다. 전국 각지에는 도심을 중심으로 속속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가난한 농촌 살림에 허덕이던 농부들은 공장인부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가정형편 등을 이유로 진학이 어려웠던 젊은이들은 농촌에 남아있기보다는 도시로 향했고 기존의 농부들도 하나둘씩 얼마 안되는 논밭을 팔고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손이 많이 가는 후진국형 산업인 섬유와 신발 등의 산업이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이같은 이농현상은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도시의 급격한 팽창을 가져왔다. 가장 많은 인구가 몰린 수도권지역에서는 아직 농촌수준을 유지하던 곳들이 지속적으로 개발돼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일자리를 찾기는 했지만 경제개발의 결실이 나타나지 않아 서민들의 삶은 여전히 궁핍함을 면치 못했다. 영세성을 면치 못하던 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해야 겨우 생활이 유지되던 것이 당시의 모습이었다.

70년대 중반 중동 개발 붐이 일어 우리의 건설사들이 사활을 걸고 중동에서 각종 공사를 따내 조그만 기술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중동 꿈 실현을 위해 비행기를 탔던 것이 당시의 풍속도이기도 했다.

게다가 20살 우리의 젊은이들이 외화를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전쟁이 한창이라 목숨을 담보할 수밖에 없었던 베트남으로 내몰렸던 것도 70년대의 일이다.

70년대 중동개발, 베트남 전쟁 등 국제사회의 형편이 수출을 통한 경제기반마련이 필요했던 국내상황과 서로 맞아 떨어지면서 여기에 맞추어 서민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다시 중동으로 옮겨간 것이다.

#80년대 -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 모색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시작한 80년대. 80년대는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이 다져져 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정책의 결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다.

20여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어느정도 생계수단이 안정되면서 시민들의 관심은 온통 자녀교육에 쏠리게 된다. 자녀 만큼은 자신들이 겪은 고생을 되풀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교육을 통해서만 신분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공부만 잘하면 뭐든 해주겠다”는 말이 당시 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었을 정도로 80년대는 교육에 관심이 높았다.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모든 힘을 쏟았으며 가능하면 교육여건이 낳은 곳에서 자녀를 교육시키려 했다.

이에 따라 지역별로 명문고가 하나 둘씩 생겨나게 됐고 시민들은 명문고 주변으로 주거를 옮겼다.

도시개발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경기고와 서울고, 휘문고 등이 강제로 강남재개발 지역으로 이주 되면서 자녀를 명문고에 진학시키려는 학부모들이 함께 옮겨온 것이 '강남 8학군'이란 말을 낳게 한 것이다.

이 같은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