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흥·광명지역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강 남부지역의 비옥한 터전인 오늘날의 과천·안양 지역을 포함한 관악구·구로구·동작구·영등포구 일원과 한강남쪽 노량진의 서남부 지역을 포용하면서 서해안의 오이도 지역을 관할하던 광대한 지역이었다. 현재의 문화지도로 보아도 서북으로는 인천·부천과 접하면서 동북으로 서울시와 안양시, 남으로 안산시와 평택시를 경계하고 있다. 한남정맥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궤를 같이하여 부천을 지나 김포의 문수산(文殊山)으로 이어지는 지세에서도 알수 있듯이 시흥시 전역은 한남정맥의 여맥이 미치는 지역이다. 해발 200m내외의 구릉이 되어 평야부로 이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전의 시흥시는 수리산과 수암봉을 기준으로 하여 그 동쪽이 동부 시흥, 그 서쪽이 서부 시흥으로 나뉘어 졌는데 동부지역의 과천, 안양, 군포, 의왕이 떨어져 나가 독립시가 되면서 오랜 역사의 뒤안길, 동부 시흥시대의 막을 내리고 서부 시흥시대로 21세기를 맞게 된다.
서부시흥의 지형은 대체로 수리산, 수암봉의 산줄기의 서쪽으로 화성시와의 경계지점에 마산(246m), 군자산(199m)이 있다. 이 산줄기의 서북쪽으로 V자형의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되는데 범내하천, 매화천, 수안천등의 작은 내가 흐르고 매화천과 범내하천의 하류는 염전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흥시의 역사적 연혁이 우리민족이 오늘이 있기까지의 궤적을 대변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쟁패기에는 한강남부의 요충으로, 고려시대 처음으로 시흥(始興)의 지명이 역사에 기록된 이래 금주→금과→금양→금천→금과→금천→시흥현→시흥군→시흥시로 지명이 변천되며 이어진다. 이 지역이 변화 무쌍한 역사발전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고려시대는 경기 좌·우도의 영역으로 고려왕도 개성을 수호하는 지역이었고 조선왕조 시대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국도 한양을 지척에서 옹위하는 위수지구의 역할이었다. 또 일제강점기는 서울외곽지역 독립운동가의 활동무대였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시흥·광명지역은 고려·조선시대를 일관하면서 명현과 석학을 배출하여 그 흔적이 세인에 각인되고 있다. 또한 금천강씨(衿川姜氏)의 고향으로, 강희맹의 관곡지 일화로 연성(蓮城)으로 별칭되기까지, 그리고 오리 이원익의 청백리정신이 이 고장을 이야기하고 있거니와, 사육신(死六臣)의 서릿발같은 기개가 오백년을 푸르게 노들 강변을 지켜보고 있는 고장이 또한 시흥의 어제이기도 한 것이다.
시흥시가 한강남쪽지역을 관할하던 고려·조선시대 지명의 현장을 추적해보면 과천·안양지역을 제외한 오늘날의 구로구, 영등포구, 금천구, 관악구, 동작구 일원에 산재한 낯설지 않은 지명과 만나게 된다. 시흥지역은 고구려 때는 잉벌노현, 신라때 곡양현이었다가 고려 태조때에 금주(衿州)가 된다. 시흥(始興)이 지명으로 정해진 것은 991년(고려 성종10)이었다.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에 금천현(衿川縣)이 된 뒤에 과천지역과 통폐합을 거듭하다가 1795년 시흥현, 1895년 시흥군이 되기까지 실로 기나긴 여로를 거쳐 시흥이란 지명이 제자리를 찾는다. 조선 영조(英祖)때 발간된 ‘여지도서’에 보면 금천현 관내의 지명이 오늘날의 지명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금천현(과거 시흥지역) 동면(東面)에는 상도리(상도동), 성도화리, 봉천리(봉천동), 신림리(신림동), 가리산리, 장내리, 서원리, 난곡리, 문교리, 독산리(독산동) 등이 속했다. 서면(西面)에는 박달리, 일직리, 소하리(광명시 소하동), 가리대리, 사대우리, 율일리, 철산리(광명시 천산동), 기성리가 들어있고 남면(南面)에 장기리, 유등리, 아방리, 노온사리(광명시 노온사동), 광명리(광명시 지명의 본고장), 광화대리가 있었다.
1895년(고종33) 5월 26일 발표된 칙령 제 98호에 의해 시흥현이 시흥군이 되면서 오늘날의 행정관료인 군수가 다스리는 고을이 된다. 이때의 시흥군청은 하북면이었던 영등포에 있었다. 군청소재지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