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시작된 A군의 캠퍼스 낭만. 흐드러진 꽃잎 사이로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두꺼운 뿔테 안경 학구파들…. 한 쪽에선 두꺼운 책을 베고 고이 눈을 붙이고 있는 휴식파들도 보인다.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서 고대 중국 철학을 논하고 있는 주사파들도…. 하지만 몇 달만에 조우한 고교 동창생은 이런 상아탑의 풍경을 전하자마자 한 마디 툭 쏘아붙인다. "지방대도 학교냐?"

#2. 충격으로 즉각 재수학원에 등록한 A군. 고교 시절 못다한 공부를 끝내 마스터해 반드시 복수혈전을 치르리라 굳게 마음 먹는다. 명문 'SKY'에 다니는 친구들이 이대·숙대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타나는 날이면 전의는 더욱 뜨겁게 불타오른다. '나도 1년 후에는…'. 하지만 고교 2년 초에 일찍이 접은 '미분·적분'은 결국 A군을 강원도 캠퍼스로 인도하고 말았다. Y대에 다닌다는 동창생, "너, 원세대생이냐?"

2009학년도 수능 성적이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대학 입시의 막이 올랐다. 이미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가(남편이) 바뀐다'는 담임 선생님의 진심(?) 어린 조언을 3년간 들으며 공부해 왔기에 입시 전략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신문지상마다 '우리 대학으로 오세요'라는 대학들 홍보 문구가 가득하지만 '마누라와 남편'을 바꿀만한 대학은 수십년째 불변의 진리로 남아 있다. 입시설명회 및 인터넷에 배포되는 배치표는 그래서 충분히 새까만 밑줄을 그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배치표가 곧 대학 서열이자 입학 후에도 친구·친지들에게 가장 '욕'을 안 먹을 굳건한 척도이기 때문이다.

훌리건 천국

물론 예전에도 배치표는 있었고, 대학 서열화 논쟁은 그보다 훨씬 앞선 고전. 하지만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 즉 어느 대학을 나와도 100% 성공을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한 2000년말부터 대학 서열은 곧 나의 얼굴이자 남의 티끌로 자리하게 됐다. 남이 망해야 내가 잘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2000년 각종 배치표를 기반으로 다음 카페에 개설된 훌리건 천국(cafe.daum.net/hoolis). 초기엔 주로 수험생들의 진학상담과 각 대학 소개 등의 정보제공 성격이 매우 강했지만 결국엔 입학 점수를 토대로 모교는 홍보하고 경쟁 학교는 '악플'로 깎아내리는 식의 타 대학 상호비방만이 난무하는 곳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동국대는 '똥꾹', 성균관대는 '병균관', 한양대는 '화냥', 고려대는 '구려', 중앙대는 '중망'이라고 부르는 건 이미 고유명사가 됐다.

현재 이들의 학교 자랑, '훌짓'(훌리건 행위)은 수능 가능지원 점수를 넘어 사법시험·행정고시·공인회계사 합격자수, 대기업 임원 배출 수, 심지어 대학 결산공고 자료에까지 범위를 확장한 상태다. 하지만 종국적으론 '우리 학교는 이만큼 훌륭하고, 남의 학교는 저만큼 처지니 아니꼬우면 우리 학교로 오라'로 귀결된다. 그리고, 우리 학교로 오는 필요충분조건은 다름 아닌 '입학 점수'다.

80년대 고착화

카페 내 훌짓의 시발은 공교롭게도 '3국대'에서 비롯됐다는 게 훌리건들의 전언. 학교 이름에 '나라 국'자가 들어가는 건국·단국·동국대를 싸잡아 촌스럽다고 공격하는 고전적 비유였다. 여기에 일부 훌리건들이 이들 3국대와 부산·경북대 등 지방 거점 국립대(지거국)를 동일선상에 올려놓으면서 훌짓의 전선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렇다면, 현재 모습의 대학 서열화는 언제부터 뿌리를 내렸을까. 종로, 대성 등과 같은 입시전문학원들이 매년 '배치표'라 불리는 대학 합격선을 발표하지만 20여년째 대학 간 서열화 줄기는 좀처럼 큰 변화 없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어 훌리건들의 논쟁은 '도토리 키 재기'란 비난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대학이 그리 많지 않았던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작금의 서열에 상당히 당황하게 된다. 1976년, 한 일간지가 게재한 '예비고사 평균점으로 본 전국대학 랭킹' 기사가 단적인 예. 현재, 한 대기업에서 운영 중인 항공 특성화 대학이 전국 4위에 랭크돼 있는가 하면 지방 국립 P대는 K대와 S대 등을 제치고 당당히 6위에 이름을 올렸다. 충남의 K국립대와 부산의 H·P대도 상당히 이채롭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예전의 서열은 점차 현재와 비슷한 양상을 갖춰가기 시작한다. 1982년과 1985년, 1988년 각각 일간지와 학원 배치표에는 굳건한 'SKY' 라인에 이어 서울의 각 상위권 대학들과 지방 거점 국립대들이 일렬로 서열을 형성하고 있으며, 1990년대 후반부턴 서울 중상위권 대학들이 지방 국립대와 유명 사립대를 딛고 올라서기 시작했다.

긍정과 희망 VS 역전 불허?

학생들은 왜 이런 경쟁에 계속 몰입할까? 일단은 자신과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위상 강화 및 좀 더 높은 점수의 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아쉬움 타파가 우선 거론된다. 최근 훌리건 카페에 게재된 '대학 월드컵' 시리즈는 이 같은 점을 십분 방증해 준다. 즉, '서울대=브라질', '연·고대=독일·아르헨티나', '모교=대한민국'이지만 스스로가 대한민국 스트라이커가 돼 언젠가 브라질과 독일 등을 연파하고, 16강, 8강에 충분히 안착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 서열에 자신을 평생 그대로 묻어가려는 의도도 다분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즉,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과 동시에 스스로를 '호날두'로 쭉 치부한다는 것.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이성식 교수는 "고려대가 대통령을 배출했다고 해서 고려대 졸업생이 모두 대통령 행세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향후 안주하려는 기득권으로 변질되거나, 변화하는 환경과는 단절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아집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