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곳에 머무는 둘째 날 우리는 신한촌을 방문했다. 러시아인들은 예로부터 우리 동포들을 '까레이스키', 즉 고려인이라고 불렀고 동포들끼리도 고려인이라 부른다.
이 피눈물로 얼룩진 고려인들이 지금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지역에 50만명 정도 살고 있고,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스리스크에만도 5만여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도시에 50만명 고려인의 근원지이며 삶의 터전이었고 마음의 고향인 '신한촌'이라는 마을이 100년 전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신한촌은 일제에 의해 쫓겨났거나 항일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연해주로 갔던 우리 선조들의 집단 거주지이자 독립 운동가들이 무기와 탄약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독립 운동가들과 새끼손가락을 끊어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곳도 이곳이며, 할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형한 권총도 바로 이 신한촌에서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1937년 스탈린의 이주정책에 의해 러시아 정부는 한국인이 일본인의 모습과 비슷해 일본과의 전쟁에서 구분이 안 되고 또 일본의 간첩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신한촌과 그 주변지역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고려인들은 하루아침에 살던 집을 떠나야 했고 살림살이조차 챙기지 못한 채 시베리아의 무서운 찬바람을 맞으면서 여객차도 아닌 화물차로 강제 이주했고 그 숫자가 정확하진 않지만 16만8천여명이며 도중에 5분의 1은 굶고 병들어 처참하게 숨졌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메었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아파트 숲속에 초라하게 철망 밖에서만 흐릿하게 보이는 기념비에 우리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순국선열들을 위한 묵념을 올리면서 정부당국이나 위정자들께 마음속으로 당부를 했다. 선진국만 찾아다니면서 대접만 받을 게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편안하게 잘살 수 있도록 독립운동을 했던 고려인들의 애환이 묻어있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고 느껴서 진정 그분들을 위하는 길이 무언지를 깨닫기를 바랐다.
러시아 정부가 비록 사회주의 국가지만 과거의 역사를 떠나 협의할 것은 협의를 해서라도 안중근 의사, 이상설 선생, 최재영 선생 등 많은 독립 운동가의 생가 복원이나 발자취 등을 잘 관리하고 보존해야만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선각자들을 존경하며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어깨를 쭉 펴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본인들의 생가를 짓는 일에 목숨을 거는데 세계 최강의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은 어쩌면 위험한 적지인 북한을 방문하여 국가를 위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정자는 물론 우리 국민 모두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