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글┃김종화기자]취재팀은 체탕(澤當)에서 초기 티베트 유적을 살펴본 후 한국인들이 티베트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도시인 '라싸(拉薩)'로 향했다. 체탕에서 라싸까지의 거리는 약 200㎞.
3시간 동안 덜컹 거리는 비포장도로를 지날 수밖에 없었지만 차창 너머로 티베트인들의 마을을 바라보는 풍경도 나쁘지는 않았다. 오후 늦은 시간에 도착한 라싸는 도시 외곽에 험준한 산이 감싸고 있었고 도심은 넓은 평야가 자리한 고원지대였다. 해발 3천600m에 위치한 라싸는 티베트어로 '신의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곳은 연평균기온이 8.3℃이며 최한월(1월) 평균기온은 -1.7℃, 최난월(6월) 평균기온은 16.7℃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따뜻한 기후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라싸는 연강수량이 400㎜에 불과하지만 강수의 대부분이 여름에 집중돼 티베트 지역 중 농업에 적합한 곳 중 한 곳으로 꼽히고 있다.
# 티베트의 위대한 왕 손챈감포

왕으로 등극한 손챈감포는 먼저 그의 아버지를 독살한 사람을 찾아 처단한 후 반란지역을 잇달아 복속시켰다. 그는 내친김에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遼寧省) 일대에서 유목을 하고 살고 있던 선비족의 일파인 토욕혼(吐谷渾)을 병합하고, 중국의 시안(西安)을 위협했다.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와 네팔을 공략해 티베트 대제국을 건설한다. 라싸로의 천도는 대제국 건설을 꿈꾸던 손챈감포가 자신의 지지기반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추진됐다. 그러나 체탕의 구(舊) 귀족 중 일부는 대외정복에 적극적인 손챈감포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불안요소 때문에 본인도 부왕(父王) 남리 손챈처럼 독살을 당하지 않을까 고민도 했다고 한다.
한편 손챈감포가 티베트인들에게 위대한 왕으로 칭송 받는 건 단지 대외적인 팽창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손챈감포는 중국과 인도 등 주변국에서 우수한 문화를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불교'도 그 중 하나다. 그리고 오늘날 티베트인들이 사용하는 문자도 바로 손챈감포 당시 만들어졌다. 손챈감포는 문자 없이는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신하들의 자제 중 총명한 16명을 뽑아 인도로 보내 문자를 배워 오게 했다. 그런데 그들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손챈감포는 다시 총명하고 의지가 곧은 톤미 삼보타(吐彌桑布札)를 인도에 보내 유학하게 한다. 톤미 삼보타는 7년 후 유명한 학자가 돼 티베트로 돌아와 산스크리트어를 기초로 30자의 티베트 문자를 만들어 낸다. 이 외에도 손챈감포는 나라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6개의 법률, 6개의 회의원칙, 6개의 관직, 6개의 포상원칙, 6개의 표식, 6개의 훈장 등 36가지의 제도를 완성해 티베트인들에게 뛰어난 문예군주로 추앙받고 있다.

# 티베트 불교, 밀교(密敎)
손챈감포가 활동했던 7세기를 전후해 티베트에 뿌리를 내린 불교를 보통 '밀교(密敎)'라고 부른다. 밀교는 7세기 인도에서 네팔, 티베트, 중국, 한국까지 전파된 불교의 유파로 수행방법과 전통의 전승이 비밀스럽다고 해 '밀교'라고 불린다. 밀교는 신체도 우주와 마찬가지로 지(地), 수(水), 화(火) 풍(風)에 상응할 수 있다고 보고, 마음뿐 아니라 신체에 대한 수행도 중시한다. 이에 반해 우리가 보통 접하는 불교인 '현교(顯敎)'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을 중요시 여기며 수행의 방법과 전통의 계승에 있어 공개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티베트 지역에 밀교가 정착하게 되는 것은 8세기 중엽 인도의 고승 샨티 락시타(寂護·700~762)와 파드마 삼바바(蓮華座)가 교리를 전파한 뒤부터다. 티베트 최초의 사원인 사뮈에사원은 파드마 삼바바가 사원 부지를 정하고 샨티 락시타가 설계를 담당해 건립한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밀교는 쇠퇴하게 되고, 서기 1038년경 인도에서 초빙된 아티샤(982~1054)가 개혁을 통한 부흥에 앞장서 13세기에는 원(元)나라에 전파돼 국교가 된다. 15세기에는 총카파(宗喀巴·1357~1419)라는 인물이 나타나 현교와 밀교를 융합한 신교도의 종교개혁운동을 통해 티베트불교의 기초를 확립했다.
한국에는 8세기 중국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승 현초(玄超)와 혜일(惠日), 오진(悟眞) 등이 밀교를 공부하고 돌아오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원나라와 정치·문화적인 교류가 밀접했던 고려 때까지 전해졌지만 배불정책(排佛政策)을 펼친 조선시대에 들어서 명맥이 끊기고 만다.

취재팀은 라싸에서의 첫 밤을 보내며 '비록 조선시대 명맥이 끊어지기는 했지만 우리의 불교 문화 속에 티베트 불교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날이 밝는대로 티베트 전통적인 색채를 잘 담고 있는 라싸의 불교 유적을 돌아보며 티베트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엿보기로 했다.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