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제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준비하면서 파주상공회 조찬모임 후 직원들과 영화제 트레일러(영화제를 알리는 홍보영상) 연출을 논의하다가 유지태라는 이름이 나왔다. 아침 이른 시간이고 내가 아는 유지태는 항상 예의가 바르지만 자기주관이 뚜렷하고 일처리 또한 깔끔하고 정확한 친구여서 쉽게 수락하지 않을텐데 하는 맘으로 후배지만 조심스레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바로 전화가 왔다. 영화제에 대해선 이미 사전 지식이 있어 설명은 필요 없었다. 결론은 트레일러 감독 제안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다는 얘기였다. 사실 영화제트레일러는 주로 감독들이 연출해 왔고 적은 제작비이기에 스태프들마저도 의미를 갖고 봉사하다시피 제작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인데 영화배우가 단편영화 연출경험이 있긴 하지만 적잖은 시간과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작업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도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작년 8월 파주 DMZ 부근 햇볕을 피할 수도 없는 폭염 속에 30명의 스태프와 연출에 열중하는 유지태를 보며 또 한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들어 제3회 영화제를 준비하며 영화제를 장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집행부 조직을 보강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유지태와 정상진이라는 두 친구를 부집행위원장으로 위촉했다. 그런데 현재 조직규정에서는 두 사람에게 어떤 대우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말이 부집행위원장이지 사실은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하는 자원봉사자인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본인 돈을 쓰면서 일을 한다. 매주 월요일이면 부천 사무실에 와서 영화제 주간회의에 참여하고 밥도 산다. 그것도 소고기로~. 거기다가 캐나다 토론토 출장은 당연히 이코노미석이다. 190㎝ 가까이 되는 키에도 아무런 불평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날아가서 프로그래밍까지 하고 돌아왔다. 또 내가 시간이 안되면 개막장소 섭외하러 군부대도 쫓아간다.
어제였다. 내가 좀 하는 일이 많아 종종 집에서 심야 회의를 하는데 혹시나 해서 전화를 했더니 위안부할머니 한분이 돌아가셔서 양평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밤 12시쯤 도착해 우리 집으로 오겠다는 거다. 너무 고마워 아끼는 와인을 큰 맘 먹고 꺼내 마시며 회의를 하는데 피곤한지 눈을 지그시 감고 얘기를 듣다가 입을 연다. "저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정말 훌륭한 영화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지속해 나가시면 세계적인 영화제가 될 거라 믿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이 너무 과분한 역할을 맡았다는 겸손까지(사실 그 부분에선 선배들에게 혼도 났다).
지금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유지태라는 아름다운 청년으로 인해 더욱 뜨겁다. 그러나 사실 그 뜨거움의 원천은 나도 유지태도 아니란 걸 우리는 안다. 우리를 이렇게 열정으로 일하게 만든 건 우리가 원하는 현실이 지금의 현실과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그 안의 DMZ가 우리를 뜨겁게 만든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정신은 평화, 생명, 소통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무엇보다 이념과 정치를 뛰어넘는 영화제를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건강하고 젊은 영화제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다만 이 건강한 울림이 비단 영화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곳곳에 지금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