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관에 걸린 캔버스가 눈을 끌어당긴다. 내가 살아오면서 순간순간 느꼈던 빛의 이미지가 기억 속에 되살아난다. 뜨거운 여름 태양이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빛의 형상들, 겨울 빛과 어우러져 한층 더 밝게 빛나던 눈빛의 촉감…. '빛'이 만들어낸 이미지라 사진에 담을 수 없었던 장면들이 마치 사진첩에서 꺼내놓은 듯 천연덕스럽게 미술관을 차지하고 있다. 기억과 작품 사이에 다른점이 있다면, 작품의 빛은 사람의 시선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
'한국·유럽 국제작가교류展-빛으로 가는 길(VERS LA LUMIERE)'전이 열리고 있는 광주 영은미술관을 찾았다. 단아한 풍모를 풍기는 박선주(44) 관장의 첫인상은 미대생이나 음대생이 어울릴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미술관을 이끌어 온 이야기를 듣고 보니 '캔디'에게서나 풍길듯한 들장미향이 나는 듯했다.
■ 창작스튜디오
미술관의 정식 명칭은 '대유문화재단 영은미술관 창작스튜디오'. 박 관장의 시할아버지 고(故)이준영(1917~2007) 이사장은 이북에서 내려와 방직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이익을 사회에 나누고자 1992년 대유문화재단을 설립했지만 그 해 큰 아들 고(故) 이상은(1940~1992)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소 미술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들의 뜻을 기려 자신과 아들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영은'미술관을 만들었다.

아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생의 마지막 사업을 후손에게 남기고 싶은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2000년 개관한 영은미술관의 초대 관장은 김영순씨였다. 홍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일본에서 활동하던 김 전 관장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창작스튜디오'를, 그것도 미술관과 같은 공간에 만들 것을 제안했다. 박 관장은 "스튜디오와 창작스튜디오가 한 공간에 자리잡고있는 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걸로 알고 있다"며 "10년 동안 90여명의 작가가 이곳에 머물다 갔고, 지금은 그들이 영은미술관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2002년부터 영은미술관을 맡아서 돌보고 있는 박 관장은 초기 미술관에 입주작가들이 기거하는 게 어색했다. 당시 잘 모르는 사람들은 큐레이터로 오해할 정도로 젊었던 박 관장에게 미술관에 미술가가 불쑥불쑥 다니고 미술관과 한 마당을 쓰는 작가 숙소에 이불 빨래가 널려있는 광경은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친구, 가족, 운명공동체로 미술관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여겨진단다. 박 관장은 "일반적인 갤러리 운영자는 전시를 끝내고 나면 작가도 작품도 모두 떠나버리니 허무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며 "영은은 전시회가 끝나도 가족처럼 그대로 남아있으니 의미있는 일을 하나 더 해냈다는 뿌듯함이 남는다"고 말했다.

영은미술관 창작 스튜디오는 입주작가를 선정할 때 나이제한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젊은 작가들은 더 심사숙고해 선발한다. '젊을 때는 어디가서 고생 좀 해도 된다'는 관장의 인생관에 다양한 연령의 작가들이 어울려 살면서 얻는 이익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지혜가 만들어낸 풍습이다. 막내작가가 32살이고 78살 되신 작가분도 계시다. 박 관장은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적당히 경쟁도 이뤄진다"며 "젊은 작가가 불만을 털어놓으면 선배작가분들이 '이런 환경에서 작품활동하는게 행복인 줄 알라'며 불만을 잠재워주고, 어린 작가들은 미술계의 새 풍조를 선배들에게 전파하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 그곳의 10년을 기억하다
영은미술관의 한 축인 시아버지는 박 관장이 결혼하기 1년전에 돌아가셔서 뵌 적이 없고, 시할아버지를 모시고 가정주부로 10년을 살았다. 8년 전, 시할아버지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미술관을 맡아서 돌봐라'라고 말씀하셨다. 박 관장은 그 말씀 한마디에 놀람도, 두려움도 없이 바로 출근을 시작했고 두달이 지나고부터는 홍대에서 예술기획 석사과정을 수강, 2년 반만에 졸업했다.

박 관장은 "제사며 행사가 너무너무 많았던 종손집 시집살이도 결혼 전에는 한번도 안해본 것이지만 10년을 해냈는데 미술관 일을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며 "무엇을 하든 '아무리 힘들어도 10년은 참고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처음에는 믿고 맡겨주신게 고맙기만 했는데 해보니 힘들더라"며 "너무 힘들때는 속으로 '맡기셨으니 살게 해달라'고 감히 시할아버지께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영은미술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당연히 기념할 만한 일이지만 박 관장은 10주년 행사를 할까말까 고민했다. 박 관장은 "단순히 기념 전시회를 하면 외부인사에게 보여주는 전시가 되기 십상이었다"며 "10주년은 작가들과의 축제가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영은의 10년을 만들어낸 작가들이 '손님'이 된 느낌을 받지 않게 하기위해 박 관장은 1~8기 작가와 큐레이터를 수소문해서 축전글을 받고 도록이 아닌 영은미술관 10년사가 담긴 책을 만들었다. 물론 전시회도 했다. 영은의 작가들이 영은에서 탄생시킨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인 광경은 가슴을 벅차 오르게 하면서도 눈물겨웠다. 박 관장은 "작가들로부터 '친정에 온 것 같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이 통했구나'싶었다"며 불과 1년전의 일을 아득한 듯 떠올렸다.

10살 영은미술관과 함께 성장하면서 박 관장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캔디가 거울속의 나하고 얘기를 나누는 듯, 박 관장은 '영은'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지금 하는게 맞는걸까?' 혼자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일들이 아직도 많다. 한번은 입주 작가에게 '내가 이자리에 앉아있는게 맞는지 모르겠어요'라며 푸념하니 작가가 하는 말이, '이북에서 여기까지 와서 성공하신 분이 허튼 눈으로 앉혔겠습니까'라며 위로하더란다. 참으로 유쾌해지는 대답이다. 박 관장은 "애플의 스티브잡스처럼 영은을 대표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며 '영은'이라는 이름만 기억되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 빛으로 가는 중
10년이 지나니 이제는 배짱도 좀 생겼다. 박 관장은 "영은은 이제 한 사람의 손을 벗어난 것을 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예술과 예술인들에게 혜택이 되는 영은을 위해 주변 관계자들에게 제법 요구를 할 줄도 알게 됐다. '영은을 위해서 기도 좀 많이 해주세요'라고. 기도의 힘일까, 세월의 힘일까. 지금 진행 중인 전시 '빛으로 가는 길'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 같다고 한다.
늘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전시 제목은 박 관장이 가칭으로 만든 것이 작가 만장일치로 그대로 정해졌다. 해외전시는 운반, 보험 등으로 돈이 무척 많이 드는데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영은이 사설미술관인 것을 알고 자국에서 경비를 지원받아와 돈이 거의 들지 않았다. 박 관장은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말을 실감했다"며 "입주작가의 아이디어와 인맥, 영은의 이름과 역사가 일을 척척 진행시켜서, 이번 전시처럼만 되면 힘들게 하나도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설미술관 관장으로 살면서 정부가 야속하지 않을리 없다. 박 관장은 "요즘 돈 있는 사람들은 레스토랑하지 미술관 안하다"며 정부의 미술관 정책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박 관장은 "사설미술관이 양적으로는 크게 늘었으나 입장료만으로는 턱없어 전기요금도 못낼 정도로 어려운 곳이 많다"며 "운영 상황을 꼼꼼히 파악해 잘 하고 있는 곳은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우리나라 사설 미술관이 외국처럼 자리잡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0년 적자를 면치 못하며 운영해온 박 관장은 앞으로 10년동안은 운영수지를 맞추는 것이 목표다. 박 관장은 "1년에 10%씩 수입을 맞춰 10년 후에는 나간 돈과 들어온 돈이 같아지게 하겠다"며 "설립자가 씨 뿌린 밭을 잘 일구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알고, 그 소명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말했다.
박 관장은 10주년을 보내고 나서 '가늘고 길게 가야 살아남는다'는 사립미술관 선배 관장들의 조언에 귀가 쏠린단다. 하지만 아마도 씩씩하고도 튼튼하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답을 찾아 줄 영은의 말에 더 마음이 쏠려있는 듯하다.
광주시 쌍령동 8의1. (031)761-0137. http://www.youngeunmuseum.org/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