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형문화재로서 전통 활과 화살을 제작하는데 열정을 다하는 파주 영집궁시박물관 유영기 관장이 활시위를 당겨보고 있다.

그의 고향은 '장단역'근처다. DMZ 안에 있는 이 곳은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말로 더 유명한 증기기관차가 미군의 폭격을 당한 곳이다. 1·4후퇴 이후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고향이 이남에 있지만 갈 수 없어서일까. 북녘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그의 눈매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고향에서 가까운 파주에 자리를 잡고 4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 영집 유영기 관장을 만났다. 그의 눈에 서글픔이 배어있는 까닭은 비단 향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 촉과 살로 만드는게 아니다

그저 길고 가는 것에 깃과 촉을 달아 만드는 줄 알았던 화살의 구조가 꽤나 복잡하다. 화살 각부 명칭만도 14가지. 맨 앞의 촉부터 토고리, 상사, 상사목띠를 지나, 화살의 몸통도 부위가 나뉜다. 깃을 몸통과 연결하는 깃간띠는 도피(복숭아나무 껍질)로 만들고 깃이 매달린 깃간에는 이름을 쓰는 자리도 있다. 촉의 모양도 다양하다. 화살표 모양뿐 아니라 박으로 만든 곤봉모양의 촉, 표창같이 생긴 촉, 끝이 양쪽으로 벌어진 촉도 있다. 화살이 이정도니 활은 말할 것도 없다. 유 관장이 운영하는 영집 궁시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활과 화살을 비롯해 활쏘기에 쓰이던 다양한 물건들과 전통 무기, 외국의 다양한 활이 전시돼 있다. 그의 유물들은 종종 TV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한다.

대형 신기전과 화차는 유 관장이 아들과 함께 수집하고, 연구하고, 복원한 것들이다. 무형문화재로서 전통 활과 화살을 제작, 전수하는데 열정을 다하는 유 관장이지만 "활쏘기를 하는 사람들조차 외국에서 들여온 양살을 전통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우리 활쏘기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박물관을 차려놨다"며 "재료를 구해서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역사와 전통, 가치를 알고 만드는 것과는 천지차이"라고 말했다. 활과 화살은 같은 옛것이어도 옹기처럼 생활용품이 아니고, 자기처럼 예술적 가치가 드높은 것도 아니어서 어떤 면에서는 박물관에 있는 것이 썩 잘 어울린다. 그러나 동이족이었던 우리의 전통문화도 함께 박제되는 것은 아닌지 하며 혼잣말을 하는 유 관장의 날숨에서는 불안과 불만이 새어나왔다.

■ 좋은시절 다시 오려나

초등학생 나이 즈음 심부름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60년이 다됐다. 물 떠와라, 숯 피워라, 대나무 가져와라 하는 아버지,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보고 다니기를 10여년. 그가 20대에 막 들어서 본격적으로 활 만들기를 시작했을 때는 막상 배울 것도 없었다.

3대째 가업이니, 궁시 만드는 유전자가 생겼을만도 하다. 유 관장은 궁사들의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겪어보지 않았지만, 어느 옛날이야기보다도 신이 나는 궁사들의 과거를 들으며 자랐다. 그는 "활을 쓸 사람이 오막살이라도 직접 와서 부탁할 정도로 대우받던 직업이었다"며 "활을 하루에 3개쯤 만들 수 있는데 활과 화살 한 벌을 팔면 쌀 한가마니에 쇠고기를 살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과거제도 있을 때는 무게 부피 폭 모두 똑같이 맞춰서 만들어야 했다"며 "한 개를 잘 만들기는 쉽지만 10개를 똑같이 만드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 경국대전에는 '궁장(조선 시대에, 군기감의 궁전색에 속하여 활과 화살을 만드는 일을 맡아 하던 장인)', '시장'을 '시신(矢臣)', '궁인(弓人 )'으로 존칭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양살인 '카보살'이 들어오면서 소비처도 사라지고 전통화살에 대한 관심도 미미하다. 가격도 터무니없이 떨어졌으니 생계유지는 언감생심이다. 유 관장은 "다 사라지고 내 안의 긍지만 남아있다"며 "그래도 물 흐르듯 걸었던 길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가고 있다"며 손에 든 화살을 매만졌다.

■ 아버지, 아들에게 전수하다

유 관장은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정부 지원도 받는다. 명예와 안정된 생활을 누릴 것 같지만, 형편은 달랐다. 유 관장은 "정부에서 전수비로 한달에 130만원을 지원해주는데 이 돈으로 전수생을 두고 가르칠 수가 없다. 나이 많은 사람은 못 두게 한다. 그러니 누가 들어오겠나"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지금 그의 전수자는 아들이다.

직장 다니던 아들이 돌연 '살일 하겠다'고 나섰을때 유 관장은 뜯어 말렸다. 그러나 전수자를 찾을 수도 없는데다 가업을 잇겠다니 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형편을 알면서도 아들을 가르쳤을 때는 정말 절박해서 그런것"이라면서도 "아들도 밤낮 보고 자라서 그런지 시켜보니 가르칠 것도 없더라"며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들은 시야를 넓혀 공구, 제작과정, 삼국, 가야, 전쟁, 과거, 훈련, 궁중 등을 망라해서 연구하고 책을 펴냈다. 아버지는 기능을, 아들은 학술을 담당하니 이처럼 흐뭇한 콤비가 또 있을까.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더 못마땅한 것은 80세가 되면 더이상 전수할 수 없고 무형문화재는 '명예직'이 된다는 것이다. 몇 년 후면 그 또한 활과 함께 박제가 되는 것이다. 유 관장은 "몇년 전 청와대에서 불러 식사하며 우리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있는데, 문제는 너무 잘 알고 있더라"며 "문화에 인색해 시정이 안 되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더욱 절망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전통을 지키는데 나이가 있을 수 없고, 전수란 만드는 게 다가 아니라 흐름과 맥을 잇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