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고향은 '장단역'근처다. DMZ 안에 있는 이 곳은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말로 더 유명한 증기기관차가 미군의 폭격을 당한 곳이다. 1·4후퇴 이후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고향이 이남에 있지만 갈 수 없어서일까. 북녘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그의 눈매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고향에서 가까운 파주에 자리를 잡고 4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 영집 유영기 관장을 만났다. 그의 눈에 서글픔이 배어있는 까닭은 비단 향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 촉과 살로 만드는게 아니다
그저 길고 가는 것에 깃과 촉을 달아 만드는 줄 알았던 화살의 구조가 꽤나 복잡하다. 화살 각부 명칭만도 14가지. 맨 앞의 촉부터 토고리, 상사, 상사목띠를 지나, 화살의 몸통도 부위가 나뉜다. 깃을 몸통과 연결하는 깃간띠는 도피(복숭아나무 껍질)로 만들고 깃이 매달린 깃간에는 이름을 쓰는 자리도 있다. 촉의 모양도 다양하다. 화살표 모양뿐 아니라 박으로 만든 곤봉모양의 촉, 표창같이 생긴 촉, 끝이 양쪽으로 벌어진 촉도 있다. 화살이 이정도니 활은 말할 것도 없다. 유 관장이 운영하는 영집 궁시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활과 화살을 비롯해 활쏘기에 쓰이던 다양한 물건들과 전통 무기, 외국의 다양한 활이 전시돼 있다. 그의 유물들은 종종 TV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한다.

■ 좋은시절 다시 오려나
초등학생 나이 즈음 심부름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60년이 다됐다. 물 떠와라, 숯 피워라, 대나무 가져와라 하는 아버지,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보고 다니기를 10여년. 그가 20대에 막 들어서 본격적으로 활 만들기를 시작했을 때는 막상 배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살인 '카보살'이 들어오면서 소비처도 사라지고 전통화살에 대한 관심도 미미하다. 가격도 터무니없이 떨어졌으니 생계유지는 언감생심이다. 유 관장은 "다 사라지고 내 안의 긍지만 남아있다"며 "그래도 물 흐르듯 걸었던 길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가고 있다"며 손에 든 화살을 매만졌다.
■ 아버지, 아들에게 전수하다
유 관장은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정부 지원도 받는다. 명예와 안정된 생활을 누릴 것 같지만, 형편은 달랐다. 유 관장은 "정부에서 전수비로 한달에 130만원을 지원해주는데 이 돈으로 전수생을 두고 가르칠 수가 없다. 나이 많은 사람은 못 두게 한다. 그러니 누가 들어오겠나"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지금 그의 전수자는 아들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더 못마땅한 것은 80세가 되면 더이상 전수할 수 없고 무형문화재는 '명예직'이 된다는 것이다. 몇 년 후면 그 또한 활과 함께 박제가 되는 것이다. 유 관장은 "몇년 전 청와대에서 불러 식사하며 우리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있는데, 문제는 너무 잘 알고 있더라"며 "문화에 인색해 시정이 안 되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더욱 절망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전통을 지키는데 나이가 있을 수 없고, 전수란 만드는 게 다가 아니라 흐름과 맥을 잇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