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관에 물감 냄새 대신 시멘트 냄새가 가득하다. 미술관 1층 한가운데를 벽돌과 시멘트가 가로지르고 있다. 벽돌, 망치, 톱 등 공사 자재들을 피해 한쪽에 놓인 그림들이 다채롭다. 지극히 한국적인 수묵화 옆에 화려하게 채색된 일본풍 그림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중국현대미술과 닮은 작품이 자리잡았다.
높은 천장은 모자이크방식으로 수놓인 작품으로 채워졌다. 전원미술관 관장 유광상(64) 화백의 인생역정만큼이나 그의 그림은 변화무쌍하다. 그리고 그는 또한번의 변화를 위해 미술관에 새 벽을 세우고 있다.
변화무쌍한 작품세계 전시 유광상 화백
가난한 어린시절 미대 포기 일본 유학길
화려했던 16년간 타국생활 접고 한국행
마흔후반 꿈에 그리던 곳에 미술관 지어
중국미술 연구중 끝없이 새로움에 도전
■ 화려한 시절
화가로서 그는 누구보다 화려한 스펙을 지녔다. 전문교육을 받지 않고도 20대에 개인전을 열었고, 30대에는 청와대 전속 화가로 일하며 외교사절들에게 선물할 그림을 그렸다. 유학길을 떠난 일본에서는 외국인임에도 미술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한국에서는 50이 되기도 전에 생존하는 미술 작가로서는 국내 최초로 미술관 관장이 됐다. 10년 전 진출한 중국 미술시장에서도 그의 그림은 인기가 높다. 이만하면 '이룰 건 다 이뤘다'고 여길만도 한데 유 관장은 17년 운영한 미술관에서 외국작가 초청전을 열기위해 얼마 전 내부공사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 미술관 허가 심사를 위해 방문한 문화관광부 심사위원들이 3번 놀랐다"고 회상했다. 당시만해도 길은 대부분이 비포장도로인데다 전기가 안들어 오는 곳도 있었던 강화도에 있는 미술관이라니, 갤러리 수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다가 번듯한 규모에 한 번 놀라고, 가로 15×세로 10m의 벽면을 꽉 채운 5천호짜리 그림을 보고 두번 놀랐단다.
그리고 마지막 놀라운 점은 이런 미술관의 주인이 너무 젊다는 것이다. 유 관장은 "47살에 미술관을 지었는데 당시 그 나이면 작가치고는 '신진'이나 '예비'라는 말을 앞에 붙여야 하는 애송이였다"며 "관람객 중에서도 작품을 보고 '이 작가는 언제 돌아가셨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그의 그림실력을 알고있던 지인의 소개로 외무부에 소속돼 일할 때 그는 아예 표구사 옆에 화실을 두고 살았다. 그는 "밤 12시에 대통령 비서가 전화해서 내일 아침까지 그림을 가져오라고 하면 밤새 그려서 보내기도 했다"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절이지만 내 그림은 20~30개국의 외교사절단의 손에 들려 외국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 가난한 고향살이

17년 전, 마흔일곱의 나이에 번듯한 미술관을 갖고 있으니 그가 재벌2세쯤은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유 관장이 미대 입시를 한창 준비하던 고교 3학년 5월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4년동안 병수발을 하느라 재산은 바닥이 드러났다.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대학다닌 사람보다 낫다'는 칭찬이 따라다녔다. 자신의 화풍을 구축하며 밥벌이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천재보다는 노력파에 더 가까웠던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그는 크게 환영받았다. 여러 사업을 하며 큰 부를 쌓은 재일교포가 그의 그림에 반해 그를 전폭 지지했다. 덕분에 유학생이었음에도 그는 방 14칸짜리 저택에서 생활하며 미술공부와 작품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10년동안 그의 그림을 지켜본 일본의 한 미술관 관장이 그를 전격 고용했다. 일개 외국인 작가인 그에게 일본인 미술관장은 3년 일한 대가로 한국에 미술관을 지어주었다. 그것이 지금의 전원미술관이다.
16년 일본에서 생활하며 공모전 등에서 상을 휩쓸고, 각종 매스컴에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던 그는 어느날 그 모든 일들을 내려놓고 오랫동안 숙원하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힘들때마다 금의환향하리라는 희망에 기대 버텼었다"는 유 관장은 "다시 찾은 고향에서 처음 미술관을 열었을 때는 꿈을 꾸는 것처럼 좋았다"면서도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고향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 다시 세계로

유 관장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짐을 싸자 미술관 관장을 비롯해 일본에서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다. 그는 "당시 미술관장이 한국에 가면 한국 최초의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승승장구하다 한국으로 돌아간 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담뱃갑에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처럼 된다며 말렸고, 그 예언은 맞아 떨어졌다"며 미술작품을 대하는 한국사람들의 태도를 지적했다.
그는 "50억원을 들여 건물을 지은 사람이 찾아와 '그림을 기증하라'고 요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다 실수한 거 있으면 좀 얻읍시다'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림을 절대 사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예술품에 제 값을 지불하는 다른 나라의 문화 수준과 비교하면 더욱 실망스러웠다. 그림은 제값에 팔리지 않았고 미술관을 찾는 이들은 IMF 이후 연간 3천여명 수준에 머물렀다.
실망도 잠시, 그는 중국으로 진출했고 다시 일본에서 전시회를 했다. 유 관장은 "내 작품이 중국에서는 한국보다 10배 비싸게도 팔린다"며 "중국미술계의 트렌드를 연구하고 작품을 하는 노력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유 관장은 아직도 매일 그림을 그리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고, 전원미술관에는 머지않아 외국인 작가의 작품이 전시될 것이다. 17년만에 처음 겪는 변화다. 그 변화가 어떤 결과의 출발점이 될지 기대된다. 인천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561, (032)-934-3560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