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지도 수집가이자 연구가인 혜정박물관 김혜정 관장은 "지도는 관광길잡이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군사, 경영, 유통 등 세상만사 모든 것과 연결돼 있다"며 "지도는 우리를 지키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카메라, 옹기, 악기, 민화 등 사립박물관을 채우는 유물이 다채롭듯, 그 형태도 다양하다. 국·공립만큼 번듯한 모양새는 없어도 개인의 열정이 담긴 사립박물관은 가정집에 자리잡기도 하고, 기업체의 공간 한 편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배움의 요람인 학교 안에도 사립박물관은 존재한다.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중앙도서관 맨 위층에 들어선 '혜정박물관'은 고지도 수집가이자 연구가인 김혜정 관장이 평생 모은 유물을 품고 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암호가 늘어선 것 같기도 한 고지도들은 혜정박물관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오래된 지도들과 40년 동고동락한 김혜정 관장
프랑스 옛 지도에 반해 수집의 길 / 몇만점의 자료 통크게 기부
아름다움과 과학이 접목된 유물 / 우리를 지키는 문화이자 힘

 
 

■ 지도에 꽂히다


김 관장은 "지도는 처음에는 보는 것이지만 보고 나면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는 자신의 '지도론'을 이야기했다. 그러고보니 지도를 보는 김 관장의 눈빛이 남다르다. 그저 종이의 표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도 안의 세계를 관찰하듯 깊고 날카롭다.

서양화 수집에 취미가 있던 김 관장은 옛날 프랑스 지도 한 점과 마주친 뒤 40년동안 줄곧 고지도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그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을만큼 서양의 고지도는 예술성이 뛰어나다.



지금의 지도처럼 산맥과 도로 위에 지명이 빼곡히 적힌 지극히 사실적인 지도가 아니라, 아직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고지도는 수집하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여기에 김 관장의 남다른 애정과 호기심이 더해져 지도에 나온 글씨 한자, 그림 하나까지 읽고 연구하다보니 그의 집은 고지도가 하나 늘면 그걸 연구하기 위한 책이 여러권 달려 오고, 그와 관계된 지도를 더 찾아 구하기를 반복하며 쌓인 고지도로 가득 찼다.


김 관장은 박물관을 열기 전에 이 유물들을 제주도에 보관했었다. 그가 30대부터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재활시설인 '혜정원' 가까이에 수장고를 마련, 오동나무 상자에 담아 유물을 보관했다. 그러던 중 지금은 돌아가신 경희대 설립자의 제안으로 지금 자리에 박물관을 짓고 유물을 옮겼다.

바닷바람에 혹여 유물이 상할까 염려했던 마음을 제주도에 남겨두고 김 관장은 지난 2004년 그의 고지도들을 '혜정박물관'에 전시했다.

■ 학자의 자격


김 관장조차 유물의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는 힘든 모양이다. 고지도만 있는게 아니라 관련 서적과 자료만 2만점이 넘는단다. 아직 정리가 안된 자료를 합하면 7만~8만점이고 이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있다.

만만치 않은 가격을 지불하고 그 많은 유물을 수집한 것도 놀라운데 그걸 통크게 기부했다니, 마음의 갈등이 있지는 않았을까 싶었지만 김 관장은 "재산 가치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연구를 위한 자료들이기에 기증할 수 있었다"고 딱부러지게 말했다.

그는 "책이 열 권, 백 권이면 내것이지만, 천 권, 만 권이면 개인의 욕심으로 소유하거나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장사꾼이 아니라 학자라면 수집의 목적은 연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학자는 연구 사료로서 유물을 소장하고 보존해야 한다"며 "유물의 개념은 바로 이런것"이라고 덧붙였다.


고지도를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연구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유물과 사료를 수집했고, 충분한 연구를 이루었으니 더는 재산적 가치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문화재벌'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재벌'이라는 단어가 아주 오랜만에 멋이 나게 쓰인 듯하다.

■ 대학박물관

11년째 대학교 안에서 박물관을 운영하는 김 관장은 확실히 지금까지 만난 사립박물관 관장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다른 박물관들처럼 건물 짓는데 수억 돈을 들이거나 운영비 적자로 은행빚까지 져야하는건 아니지만, 외부 전시할 비용을 마련하느라 김 관장은 '거지노릇'을 자처한단다.


전시후원자를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하는 일이 가장 바쁘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김 관장이 외부 전시를 굳이 기획하는 것은 대학의 문지방이 높아 정작 지역 주민들은 잘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외부기관이나 외국에서 학교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꼭 이곳을 들러가지만 일반 관람객은 적어서 아쉽다"며 "지도를 더욱 알리기 위해 세계고지도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그의 연구실에 걸린 세계고지도박물관의 조감도는 둥근 지구의 모양이다. 둥근 건물안에 지도로 가득찬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랜전 일이지만 잡힐듯 하면서도 잘 잡히지 않는 꿈이란다. 이것 말고도 지도학과를 만들고, 문화재단을 설립해 지도 연구자를 키워낸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김 관장이 이처럼 지도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 노력하는 것은 지도가 '기초문화'라는 믿음때문이다. 그는 "관광길잡이로서의 기능만 있는게 아니라 군사, 경영, 유통 등 세상만사 모든 것과 연결돼있다"며 "지도는 곧 우리를 지키는 힘"이라고 말했다.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표시된 일본 지도 여러점이 전시돼 있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그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고지도 수집에서 출발해 40년동안 한 가지 연구에 몰두한 김 관장은 "옛날지도는 예술이고 현재의 지도는 과학"이라며 "고로 지도는 예술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명쾌한 결론에서부터 다시 출발하는 김 관장의 새로운 꿈들이 실현됐을 때, 미래 우리나라의 지도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용인시 기흥구 서천동1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중앙도서관 4층/(031)201-2011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