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마침내 불펜 투구를 시작했다. 부상으로 인한 인대접합수술로 계약을 꺼리는 삼성라이온즈를 뒤로하고 홀연히 일본으로 건너가 재기에 성공한 잠수함 투수. 160㎞를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광속구를 뿌리며 일본 타자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선수. 미스터 제로는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야쿠르트 스왈로우스에서 마무리 역할을 했던 그는 제비군단의 수호신이었다. 일본 선수들은 그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형처럼 따랐고 더러는 롤 모델로 삼았다. 재기의 화신이었기에.
야쿠르트가 그를 버린 건 두번째 찾아 온 부상 때문이었다. 지금 그의 팔꿈치 안쪽엔 10㎝의 깊은 인대접합 수술자국이 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 온다면 돌아갈 곳은 원 소속팀 삼성라이온즈밖에 없었다. 팔꿈치 수술을 두번씩이나 받고, 재활이 필요하며, 이제 나이 37세인 노장을 두고 삼성라이온즈는 지난해 말 뜬금없이 "영입 할 생각은 없다"고 먼저 발표해 버렸다. 그때 그에게 손을 내민 곳은 메이저리그의 시카고 컵스. 컵스는 그동안 부상선수를 데려다 재활을 시켜 팀 전력에 보탬이 되게 하는 시스템으로 재미를 톡톡히 봤다. 미국 스포츠 전문매체 '리블리처리포트'는 컵스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빌리 빈 오클랜드 단장의 '머니볼'에 빗대 '메디신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계약금 10만 달러. 두 시즌 동안 마이너리그 연봉을 받지만 메이저리그 승격 시 최대 2년간 500만 달러를 받는 썩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이 계약을 도박이라고 본 언론도 있었다.
재활을 마친 미스터 제로가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더블A 첫 등판에서 무실점을 기록하더니 곧바로 트리플A로 승격 첫 등판에서 '뱀직구'의 위용을 과시하며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지금 다저스의 류현진, 레즈의 추신수의 활약으로 메이저리그의 관심이 뜨겁지만 곧 시카고 리글리 필드에 우뚝 선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강점은 어려움 속에서 절대 무너지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 한일통산 296세이브를 기록하고 있는 그가 한미일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한다면 그것 역시 의미있는 역사가 될 것이다. 꿈의 무대를 향해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한걸음 다가선 미스타 제로, 임창용은 늘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