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원
정석원 연천군 사회복지사
오(吳) 할머니는 하루에 흰 우유를 두 개씩 마십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가 우유를 드시게 했습니다. 밥 다음으로 이만한 보약이 없다고 믿습니다. 우윳값은 항상 미리 준비해놓습니다. 손 가까운데 두었다가 매일 현금으로 값을 치릅니다.

가정배달 우유는 예나 지금이나 후불제입니다. 어디든 서너 달 치 우윳값을 날로 먹고 달아나는 이가 꼭 있었습니다. 월말이면 대리점 우윳값을 막느라 배달 아줌마는 여기저기 파수변을 얻기도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늘 현찰입니다.

당신도 지난 20년간을 우유 아줌마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짐받이가 튼실한 배달 자전거를 아직도 타고 다닙니다. 손잡이에 간장종지 만한 따르릉 벨도 그대로입니다.

그렁그렁한 기침을 내면서 담배는 손에 놓지 못합니다. 담뱃값이 올라 하루 반 갑으로 줄였습니다. 하지만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한가치를 세 번에 나누어 태웁니다. 할머니 꽁초는 당신 손가락 마디마디 옹이를 닮았습니다.

담뱃값을 인상했지만 흡연율이 크게 낮아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서민들 부담이 늘어난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뉴스에서 공병 값을 올린다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내놓지 않아 공병 줍기도 어렵습니다. 소주병 40원, 맥주병 50원인 공병 보증금이 너무 낮아 회수가 잘되지 않자 각각 100원, 130원으로 올려준다 했습니다. 우리나라 공병 회수율은 선진국에 비해 낮습니다.

특히 재활용 횟수는 평균 8회로 독일의 40회에 비해 20%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값은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정초에 가족들로 북적대야 할 할머니의 마루는 공병박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같이 사는 집에 좀도둑이 들었습니다. 텔레비전 한 대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집주인이 고장 난 대문을 다시 했습니다. 이제는 가스 불 말고도 대문 열쇠도 챙겨야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열쇠는 세 개입니다. 폐지를 담는 손수레와 자전거, 그리고 대문 열쇠입니다. 옷핀으로 바늘땀을 내어 옷 속에 달고 다닙니다.

윗집에서 닭 국물에 삶은 떡국을 내려보냈습니다. 2층 아주머니는 식당일로 마흔 가까운 아들을 수년째 부양하고 삽니다. 마땅한 일없이 노는 바람에 없어진 텔레비전이 그이 짓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집에 있는 아들을 피해 밤일까지 하고 새벽녘에 잠깐 눈만 붙이고 나간다고 합니다. 세상의 어머니는 다 그렇습니다.

마을금고에 다니는 친구 딸이 있는데 세밑에 달력에다 식용유 한 병을 챙겨주었습니다. "어제도 위에서 나물을 한 양푼 가지고 내려왔더라. 그래서 내 지름 선사받은 거 올려보냈다. 다들 잘해준다. 그러니 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며칠 전 동사무소에 다녀왔습니다. 할머니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노인일자리 사업을 신청했습니다. 고맙게도 독거노인 사례관리사 전화번호가 문지방 옆으로 큼지막하게 붙어있습니다.

어이아들이 밥상을 물리고 손바닥만 한 천장을 향해 누웠습니다. 아들은 어질더분한 살림살이가 못마땅합니다.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처럼 가뭇없는 현실을 비켜나고 싶습니다.

늘그막 삶이 일매지게 꼭 같은 오 노인에게 오래간만에 자랑거리가 생겼습니다. 손자가 은행에 취직을 했습니다. 아들에게 신문지에 싼 돈을 내놓습니다. 잘 챙기라며 "할미가 양복 한 벌 해주고 싶은데 색깔은 남색이 좋을 것 같다"고 합니다.

음력 정월 초하루였습니다. 바삐 서둘 일도 없는 아들은 굳이 첫 버스를 고집했습니다. 새벽 어스름이 큰길까지 배웅을 허락했습니다. "어이 가거라." 귀경길에 아들은 물 한 모금 넘길 수 없었습니다.

이번 설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묵은 달력을 넘겨주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정석원 연천군 사회복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