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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성 입구의 당성사적비. /부흥고 제공

한강과 함께 전략적요충지 꼽혀
훗날 통일신라 당나라 교류통로


화성에는 크고 작은 산성들이 남아 있답니다. 그중에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인 산성을 꼽으라고 한다면 서신면 구봉산의 당성(사적 제217호)일 것입니다. 삼국 통일 후 신라가 당(唐)과의 교류 통로로 활용한 항구, 중국의 산둥 반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항구, '당항성'으로 알려진 곳이지요.

산성의 가장 높은 망해루에 올라서면 제부도와 전곡항을 비롯한 서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일제강점기 간척 사업을 하기 전만 하더라도 밀물 때면 성벽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항구의 모습을 갖추고 있던 곳이었죠. 신라인들에게는 중국을 오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항구였답니다.

당성을 포함한 한강 하류 유역은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의 땅이었답니다. 하지만 장수왕의 침입으로 한성을 떠나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백제인들에게는 '잃어버린 땅', '다시 찾고 싶은 땅'이 됐죠.

6세기, 사비(부여)로 다시 도읍을 옮긴 성왕은 한강 유역을 회복해 4세기 근초고왕 때의 명성을 되찾으려는 꿈을 품고 있었답니다. 성왕은 고구려군을 몰아내기 위해 먼저 신라에 협력을 요청했답니다.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진흥왕이 성왕의 제안에 응해 두 나라는 연합 공격으로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한강 유역을 되찾았답니다.

(551년) 그런데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고구려와 백제에 가려져 있던 신라 역시 내심 한강 하류 지역에 대한 관심이 있었답니다. 결국, 신라는 고구려와의 밀약을 성사시킨 후 백제군을 공격해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았답니다. (553년)

신라 진흥왕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 백제 성왕은 앙갚음을 위해 우호 관계에 있던 왜, 대가야와 연합군을 꾸려 신라로 진격해 들어갔답니다. 성왕은 지휘관으로 아들 창(훗날 위덕왕)을 내보냈답니다.

전투 초기 백제가 우세했지만, 신라의 군사가 보충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투를 격려하기 위해 관산성으로 이동하던 성왕이 신라 매복군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면서 승세는 신라군 쪽으로 기울었고 창은 겨우 탈출했답니다.

이후 신라는 이 당성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며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아갔답니다. 많은 신라인은 이곳을 거쳐 유학, 불교 연구, 무역 등 여러 목적으로 당을 향해 떠났답니다. 당 유학길에 올랐던 최치원이 당성을 거쳐 당으로 떠났고 원효와 의상 역시 당성을 통해 중국으로 가려 했었답니다.

두 스님이 하룻밤 머물며 해골에 고인 물을 먹었다는 이야기 속 바위굴도 당성으로 오는 길목인 평택시 포승읍의 수도사 근처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지금의 당성이 그 당시 당과 교류하던 최대의 항구가 맞는지를 명확하게 밝히기 위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 일부 학자들은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로 보고 당성을 실크로드 상의 한반도 관문으로 설정하려고도 합니다.

앞으로 연구 결과를 지켜보면서 당성이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이었는지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김효중 부흥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