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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8일 '조선독립청년단대회'서 일제규탄 선언서
12·23일 히비야공원서 또 시위… 훗날 신간회 지회 창립
헌정기념관엔 이토 저격 안중근 탄환… 역사적 설명 없어
침략 반성 흔적 없는 도쿄, 사죄공간 마련 베를린과 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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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도쿄에 한반도의 독립을 꿈꾸는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마음이 일렁였다.

같은해 12월 아사히신문 등을 통해 재미동포들의 독립운동과 뉴욕에서 열린 소약속국동맹회의 2차 연례총회에서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소식도 전해 들었다.

1919년 2월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의 결산 총회가 있다는 명목 아래 유학생 대회가 열렸고 개회가 선언된 후 대회의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꿨다.

그리고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고, 곧이어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독립선언서는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조선 병합이 한민족의 의사를 무시한채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겼다.

3·1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 역사적인 사건을 '2·8독립선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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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YMCA에 입구에 설치 되어 있는 '1919·2·8조선독립선언기념비'./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 기억해야 하는 것과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


도쿄에서 100년 전 2·8독립선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역사의 현장인 도쿄YMCA를 찾았다.

입구에는 2·8독립선언의 의의를 오랫동안 알리기 위해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와 함께 조성한 '1919.2.8 조선독립선언기념비'가 서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이 있다. 기념자료실은 재일본한국YMCA 창립100주년기념 사업의 하나로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

기념자료실의 각종 자료들은 2·8독립선언이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킨 3·1운동의 시작점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당시 도쿄로 유학온 조선 유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여실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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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YMCA '2·8독립선언 기념 자료실'을 통해 공개된 자료.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도쿄YMCA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념 자료실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2·8독립선언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도왔던 일본인 변호사들과 일본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2·8독립선언은 적국의 중심인 도쿄에서 이렇게 기억되고 있다.

2·8독립선언을 이끈 학생 중 상당수는 와세다대학 출신이다. 이들은 2·8독립선언 이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 중 하나가 신간회 도쿄지회다. 신간회 도쿄지회는 1927년 5월7일 와세다대학 스코트홀에서 창립됐다. 현재 와세다교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스코트홀은 신간회가 창립된 곳이지만 건물 주변 어디에서도 신간회 창립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2·8독립선언이 있은 후 4일 뒤 재일 유학생 100여명이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고 독립을 부르짖었다.

또 같은달 23일 히비야공원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가 배포됐고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히비야공원은 100년 전 두 사건의 현장이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유학생들의 처절한 독립의지를 되뇔 수 있는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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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부르짖었던 히비야공원 전경.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 도쿄에서 만난 안중근 의사의 탄환


일본 국회의사당 바로 앞에는 헌정기념관이 있다. 헌정기념관에는 일본 현대사와 관련한 다양한 전시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헌정기념관 2층 본전시실로 올라가면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한 총알이 전시되어 있다. 이토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 앞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했다.

당시 이토히로부미 외에도 수행원 3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총알은 이토히로부미가 아닌 그를 수행했던 만주이사 다나카(田中淸次郞)의 환부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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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헌정기념관 자료실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탄환.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왜 저격했고, 또 당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상황이 어땠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총알 곁에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조난(遭難)'이라고 적혀 있다.

한국인에게 이 총알은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되뇌며 독립을 부르짖었던 열사들의 투지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일본인들은 후대에 어떤 의미를 전해 주기 위해 헌정기념관이라는 의미 있는 공간에 이 총알을 전시하고 있는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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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5월7일 신간회 도쿄지회 창립 행사가 열린 스코트홀(현재 와세다교회).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 일본과 독일 서로 다른 행보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는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인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사건을 반성하는 공간이 있다.

매년 이곳은 350만명이 방문한다. 독일인들은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8독립선언에 대한 흔적을 찾기 위해 도쿄시내 여러 장소를 방문했지만 독립을 꿈꾸던 우리 조선 유학생들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반면 작금의 일본은 역사를 망각하고 자가당착적 역사인식으로 아직도 군국주의 망령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