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들어올린 벽지에 도마뱀이 숨어 있었다 / 난 네가 흘린 얼룩이야, 습기가 꼬물꼬물 / 정충들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
우리는 당신이 버린 도마뱀이에요, / 정충들이 없는 입을 모아 말했다
팔베개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 백지 아래 흐르는 실개천은 어느 것이 더 가려울까? / 추억은 몸의 끝에서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고 / 폐허를 증거하듯 중언부언이 찾아왔다
도마뱀은 이동할 때에는 폐가 눌려 숨을 멈춘다지? / 조그셔틀 돌릴 때처럼 / 빠르게 걷고 멈춰서 숨 쉬고 다시 걷고 / 어린 시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 급히 고개 돌리듯 / 언뜻 벽지가 숨 쉬는 것을 본 듯도 하다 / 도마뱀은 지금 벽지 위의 꽃을 흉내 내고 있다
그런데 그때 너는 화花라고 꽃이라고 / 어떻게 두 번씩이나 발음했니? 어쩌면 네게도 / 다 피우지 못한 참화가 있었던 거니? / 그것도 꽃이라고 너는 / 달아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권혁웅(1967~)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무궁화는 초봄에 잎을 틔우기 시작해서 6월에 꽃망울을 맺는다. 꽃을 피우는 기간은 약 100여 일에 이르며 한 나무에서 꽃송이를 500여 송이에서 2천여 송이를 피우는 식물이다. '섬세한 아름다움'이라는 꽃말을 가진 무궁화를 어렸을적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술래 놀이'를 통해 꽃보다 먼저 만났다. 술래가 벽을 보고 '중언부언'처럼 이 구호를 외치는데 끝냄과 동시에 재빠르게 뒤돌아 보았을 때 움직이는 아이를 술래가 잡아내는 놀이다. 구호를 반복하는 동안 아이들은 술래가 알아채지 못하게 '습기가 꼬물꼬물' 가듯이 '정충들처럼 기어' 가듯이 '빠르게 걷고 멈춰서 숨 쉬고 다시 걷고' 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추억은 몸의 끝에서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고' 삶이라는 놀이 때문에 "달아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 우리는 '그것도 꽃이라고' 술래의 입에서 나온 무궁화꽃을 통해 그러한 삶을 먼저 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