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의 '무제'


'철도 레일 지지대' 뭉치고 표면 조각

인간 주제 삼아… '얼굴 형상' 재탄생

정현 作 '무제'. /경기도미술관 소장
정현 作 '무제'. /경기도미술관 소장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낡은 목재가 한데 모여 있다. 표면에 고스란히 쌓인 묵은 때와 곳곳의 썩고 빠진 옹이가 그간의 세월을 짐작게 한다. 그 세월의 흔적을 쫓다 보면 어느새 투박하게 드러난 절단면에 시선이 멈춘다. '날것'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정현은 동시대 미술계에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조각가다. 그는 조각을 매체로 '인간'이란 주제를 치열하게 탐구해 왔다. 그의 조각에서는 재료와 형태는 달라도 늘 '인간'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정현의 조각이 단순히 육체의 외연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존엄성, 그리고 응축된 생명력이야말로 그의 작업의 정수(精髓)로 꼽을 수 있다.

경기도미술관 소장품인 '무제'는 철도의 레일을 지지하는 막대인 침목(枕木)을 재료로 사용하였다. 작가와 침목의 인연은 오래전 시작되었다. 그가 어렸을 적 놀던 철길에서 기차가 달릴 때 느꼈던 땅의 묵직한 출렁거림이 이후 침목과 작품을 연결 짓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침목으로 작업을 시작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됐다. 그는 기차에 짓이기고 자갈과 사투를 벌인 침목 자체의 서사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무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작품 군데군데 둥그런 파임이 눈에 띈다. 이는 침목과 레일을 결합했던 자국으로, 보는 이에게 침목의 본래 쓰임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침목은 온갖 방부제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레일 아래에서 십여 년을 숨죽이며 버텨냈다.

정현은 이미 닳고 닳은 폐침목을 모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고는 다시 이곳저곳을 잘라내고 도끼로 표면을 내리찍었다. 이렇게 침목은 인간의 얼굴과 같은 형상으로 재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면목은 거칠게 잘려 나간 단면에서 드러난다. 가려졌던 속살에서 흘러넘치는 생명력은 침목이 본디 나무였음을 비로소 말해준다. 정현은 이를 '날것의 힘'이라 말한다. 이처럼 작가는 침목의 물성과 서사를 겸허히 수용하며 다시금 소생시키고 있다.

/조은솔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