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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선감학원을 현장 취재했던 이창식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이 취재진에게 당시 보도된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김동현기자 kdhit@kyeongin.com

이미 60여년 전 수면 위로 올라온 진실이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가까운 서쪽 바다 선감도라는 섬, 그 곳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어린 소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 그 곳에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배우지도 못한 채 하루 10시간씩 어른도 감당키 어려운 노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을 눈감았다면, 그건 무관심이다. 무관심이 부른 비극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56년 세상에 처음 드러난 선감학원 운영 실태

'기아에 떠는 원생…희열보다 비애가 커지는 아방궁' (1956년 8월 31일 경인일보)

→1956년 8월 28일 현재 174명의 부랑아를 수용하고 있는 선감학원의 운영 실태는 입에 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육지와 동떨어진 도서라는 점 때문에 부정 적발이 쉽지 않았다. (중략) 원생들은 헐벗고 배곯고 교육보다는 강제 노역에 혹사 당했다. 일부 원생들은 뭍으로 탈출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한 참사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했다. (중략) 우선 의아의 초점은 막대한 예산 가운데 학원 운영비로 744만1천700환, 사무비로 425만4천300환이 지출된 점이 이해하기 어렵다. (중략) 원아의 옷차림이 초라한 것은 고사하고 학원 사무실과 직원 화장실은 호화찬란해서 원생들의 생활관과 조화롭지 못했다. 운영비 744만환으로 마련한 급식은 '꽁보리밥'에 '호박죽' 그나마도 때에 따라서는 '간장'이 전부였다. 상주 직원이 14명, 섬 안에 함께 사는 가족까지 합치면 100명이 넘었다. 이는 가족을 위한 선감학원이라고 비난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기사에는 상세히 쓰지 못했지만 직원 화장실을 두고 이 기자는 "호화찬란했다"고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기막힐 노릇이라고 했다.

"56년 엔 일반 가정도 모두 푸세식 화장실을 쓸 때에요. 최고급 호텔이나 가야 서양식 양변기가 있었지. 원생들 화장실은 푸세식인데, 직원들 화장실엔 양변기가 있었고 아주 호화찬란했지. 너무 차이가 나서 씁쓸했지."

1956년 원생 강제노역 혹사 보도
"직원 화장실엔 호텔같은 양변기"

강제노역, 탈출과정의 익사, 열악한 의식주. 선감학원의 총제적 문제들이 두 기자의 용기있는 보도로 어렵사리 세상 밖에 나왔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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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이창식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이 당시 관선 경기도지사인 박창원 육군 준장 등과 선감학원에 방문했던 사진. /이창식 전 국장 제공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61년, 이 기자는 다시 한 번 선감학원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관선 경기도지사였던 박창원 육군 준장을 따라 선감학원 시찰에 동행하면서다.

"나로서는 매우 궁금했지. 아이들 생활이 좀 달라졌을까 걱정도 됐고. 그때도 8월 여름이었어요. 하지만 6년 전이나 후나 똑같았어요." 박창원 준장은 도착하자마자 원생 생활관으로 직행했다.

"그때와 달리 도지사가 간다니까 정리해놓았는지 모포가 네모 반듯하게 접혀있더라고. 근데 박 준장이 모포를 지휘봉으로 딱 들었어요. 모포가 쫙 펴졌는데, 다들 놀랐지. 구멍이 숭숭 뚫려서 너덜너덜해. 6년 전이랑 달라진 게 없는거야."

드러난 사실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 후로 이따금 선감학원의 실상을 다룬 보도들이 나오기도 했다.

경인일보 보도 이후 1963년 경향신문에는 부모가 있는 아이가 선감학원에 붙잡혀 갔다가 극적으로 상봉했다는 기사와 함께 1964년엔 선감학원이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마구잡이로 수용했다는 기사도 보도됐다.
1963년에는 "과잉·마구잡이 단속"
1964년 "위험 무릅쓴 탈출"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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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최초로 선감학원 비리를 폭로한 1956년 8월31일자 경인일보 사회면 기사. /이창식 전 국장 제공
 

'당챦은 부랑아로' (1963년 7월 12일 경향신문)

→길을 잃고 방황하다 불량아 단속에 적발돼 아동보호소를 전전긍긍하던 12세 소년이 그를 찾아 헤매던 부모들과 8개월 만인 11일 하오 5시 극적인 상봉 후 그리던 집으로 돌아갔다 (중략) 부모는 아이가 선감으로 이송된 것을 확인, 선감학원에서 수원 혜광원으로 이송되어 수용 중인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자유에의 탈출…부랑아 수용소 선감학원생들' (1964년 10월 26일 경향신문)

→국가에서 운영하는 부랑소년 수용소인 소년원에 대부분의 원생이 부모나 연고자가 있고 자유 없는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탈출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 동심이 흐려지고 있다. (중략) 금년 들어 103명이 사방이 바다로 싸인 섬으로부터 탈출을 기도하는 등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선감학원생 427명 중 3분의 2가 부모나 연고자가 있는 소년들인데 일과에 짜인 부자유스러운 생활과 먼저 들어온 원생들의 까다로운 하명상복관계와 종일하는 일에 지쳐 위험을 무릅쓰고 바닷물로 탈출을 기도하는 것이다. (중략) 선감학원장 문기성씨는 "원아들이 모두가 연고자가 있다"고 말하면서 "부자유스러운 생활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탈출하려고 갖은 수단을 쓰고 있다"고 실정을 말했다.

이들 기사를 살펴보면 지금 선감학원의 실태로 고발되는 다수의 내용이 그대로 보도됐다. 1963년 기사에는 길을 잃은 아이가 선감학원에 수용됐다가 또 다른 아동보호소로 전원된 후 부모와 상봉했는데, 이를 두고 과잉단속이 부른 빗나간 아동복지라고 비판하며 부랑아가 아닌 아동을 마구잡이로 잡아간 선감학원 수용실태가 고발됐다.

1964년 기사는 선감학원 원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한다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 특히 해당 기사에 등장하는 '지유성' 원생은 정확한 집 주소를 알고 있었고 부모가 있었으며 인천으로 전국체육대회를 구경 왔다 선감학원에 끌려왔다는 진술을 했다.

 

 

1982년 폐쇄까지 원생들 고통 지속 

지유성 원생처럼 당시 전국체전에서 선감학원으로 잡혀 온 부랑아가 82명이라며 기사에는 연고지와 부모가 있는 아동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로 1982년 선감학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특이할만한 언론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무관심 속에 원생들이 겪은 비극은 수십년 간 이어졌다. 원생들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

정치부 공지영 차장, 신현정·고건 기자, 사회교육부 배재흥·김동한 기자, 디지털콘텐츠팀 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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