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 똥물투척에 마음 흔들린 10대

27살 신문사 들어가 37년간 외길 인생

사비 털어 제민일보 세우고 4·3 취재

왜곡 없이 실리는 기사에 제보 이어져

진실 밝히기만 했으니 ‘4·3’이 주어인 셈

 

제주-인천 역사 교차해 배우는 학생들

“한강 작가 말하듯, 과거가 현재 구해”

제주4·3 취재물 연재부터 진상 규명까지… 37년간 한길로 이끌어준 건 내 스스로 거머쥔 과제와 물음이었다.

김종민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김종민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1986년 5월3일 인천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역 앞 인천시민회관사거리가 인파로 뒤덮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인 수많은 군중은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날 광장을 가득 채운 물결에 스물여섯의 청년 김종민도 몸을 맡겼다. 군사 정권에 오랫동안 억눌린 시민 분노가 폭발했다. ‘운동권’도 아닌 김종민도 그 흐름을 거부할 수 없어 시민회관 앞으로 달려가 동참했다. 인천 5·3민주항쟁을 경험한 김종민은 ‘제주 4·3’의 기억과 아픔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알리는 기록자가 됐다. 결코 쉽지 않은 노정이었고, 지금도 그 길 위에 서 있다. 아임프롬인천 쉰한 번째 초대 손님은 제주4·3평화재단 김종민 이사장이다. 그는 제주 4·3이 제주 공동체의 아픈 역사를 넘어, 어떤 고난도 극복해 낸 끈질긴 생명력과 회복력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지난 15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만난 김종민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15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만난 김종민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인천 부평에 뿌리 내린 ‘제주 소년’

김 이사장은 제주에서 태어났고 인천 부평에서 줄곧 학창시절을 보냈다.

“부평역에서 계양산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지금은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그곳에 부모님이 논농사를 지었어요. 그 시기 제주도는 정말 먹고살기 힘들었어요. 쌀이 최고로 비쌀 때인데 제주도는 대부분 건천(乾川)이고, 평상시 물이 흐르지 않아 논농사가 전혀 되지를 않았어요. ”

김 이사장이 태어난 1961년 제주에선 감귤 농사를 짓는 가정이 많지 않았다. 감귤 나무 두 그루로 대학 등록금을 번다는 ‘대학나무’라는 말이 나오기 한참 전이었다. 보리나 메밀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밥벌이도 안 됐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는 제주 재산을 팔아 부평에 논 3천평을 사 육지로 이주해 4남매를 키웠다. 김 이사장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됐을 무렵 부모는 서귀포 효돈으로 이주했다. 부모 대신 장남이 어린 3남매를 돌봤다.

“부모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다가 부모가 제주로 내려가 안 계시니까 완전히 애어른이 됐지. 그때만 해도 촌지가 아주 흔했던 일이라, 운동회 때 찬조금을 낸 학생 이름을 구령대 앞 천막에 걸어놓을 정도였죠. 촌지 안 냈다고 선생님에게 뺨을 맞기도 했었죠.”

어린시절 제주도 감귤밭에서 형제들과 함께 찍은 김종민(맨 오른쪽) 이사장 사진. /김종민 제공
어린시절 제주도 감귤밭에서 형제들과 함께 찍은 김종민(맨 오른쪽) 이사장 사진. /김종민 제공

김 이사장이 중학생이던 시절 부평구는 계양구로 분구되기 전이었다. 1975년 인천에 고교 평준화 정책이 도입되면서 학군이 조성됐다. 부평고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특수지 고등학교’(전기 일반계 고교)로 지정됐다. 인천 중심지와 상당히 거리가 먼 부평고는 교통 여건 등을 고려해 평준화 정책을 적용하지 않는 ‘예외 학교’였다. 부평고는 4년 간 특수지 고등학교로 유지됐다. 입학 시험이 어려웠고,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대거 몰렸다. 특수지 고교 기간(4~7회 졸업생) 도성훈 인천시교육감(5회), 맹성규 더불어민주당 의원(7회) 등이 공부했다. 김 이사장은 6회 졸업이다.

고교 2학년이던 1978년, 김종민의 ‘마움을 움직인 사건’이 인천에서 발생했다. 성당에 다니는 친구가 가져온 사진을 본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2월21일 인천 동구 만석동에 일방직에 다니는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쓴 사진이었다.

“언론에도 나오지 않아 모르고 있었어요. 신부님이 사진을 보여주며 주변에 알리라 한 모양이야. 아직 철부지 고등학생에 불과했지만, 어떻게 사람에게 똥을 뿌릴 수 있느냐. 굉장히 충격적 일이었지요.”

김종민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og@kyeongin.com
김종민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og@kyeongin.com

귀농의 꿈을 품은 청년, 지역신문 기자가 되다

김 이사장은 고려대 사학과 2학년을 마칠 무렵 제주에 계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어머니가 계신 제주도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제주대 사학과 편입을 준비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제주대 사학과에는 1기생(81학번)만 있었기 때문에 80학번인 그가 편입을 하면 1학년을 다시 해야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편입을 하지 못한 김 이사장은 군입대 영장을 받고 입대했다.

제대 후 복학도 하지 않으려는 그에게 어머니는 “졸업은 하고 제주로 오라”고 했다. 귀농의 꿈을 갖고 있었던 김 이사장은 ‘애기능 캠퍼스’라고 불리는 이공계 캠퍼스에 살다시피했다. 사학 과목은 필수 과목 이수만 하고, 농과대학에서 수업을 들으며 ‘조직 배양법’, ‘멀칭 재배법’ 등을 배우며 귀농을 준비했고, 1986년 4학년 학기말 시험을 마친 뒤 제주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감귤 농사를 지었다.

동네에서는 ‘가짜 대학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농업학교 나온 애들도 농사짓기 싫다 하는데, 서울서 대학 나온 놈이 왜 농사를 짓냐”는 시선이었다. 아버지 제삿날, 친척 어른이 ‘제주신문 모집 공고’를 들고 왔고, 어머니는 1년만 기자로 일할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그의 삶은 전환점을 맞았다.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이 특별취재반 시절 제주 4·3사건을 취재했던 일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이 특별취재반 시절 제주 4·3사건을 취재했던 일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그는 1987년 8월 제주신문에 입사했다. 그해 6·10항쟁의 여파로 형성된 ‘민주화 바람’이 제주 지역까지 불어왔다. 1988년 3월 제주신문은 ‘제주4·3 특별취재반’을 구성했고, 막 수습을 마친 그도 합류했다. 김 이사장과 제주 4·3의 만남이 시작됐다.

“일반 기획과 달리 해방 전후에 사료도 봐야 했어요. 또 미군 보고서도 봐야하기 때문에 ‘사학과 나온 놈이 선배들 따라서 심부름이나 하라’는 소리로 알아듣고 취재에 임했죠.”

그 이후 기획 취재물 연재, 제주4·3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 활동 등을 힘써온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27살에 신문사에 들어가 60대 중반까지 한 길을 걸을 수 있는지, 어떤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는지 묻지만, 처음 시작할 때 그랬던 건 아니죠. 이거 하나 해결해 놓으면 새로운 과제가 생기고, 어떤 때는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지금 나아갈 방향성과 앞으로 해야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내 스스로에게 과제로 부여하고 그러면서 하다보니 37년이 된거야. 너무 감사하지.”

김종민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김종민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제민일보의 탄생과 ‘4·3은 말한다’

1년간 준비를 마치고 1989년 제주신문은 ‘제주 4·3의 증언’을 시작하며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에 나섰지만 57회차 보도 후 중단됐다. 사주를 상대로 한 ‘언론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사주가 전두환 형제들하고 서로 호형호제하던 사이였어요. 전두환 동생이 새마을운동중앙본부장을 맡았고, 제주지부장을 신문사 사주가 맡았지. 당시 제주지부장은 도지사보다 힘이 셀 정도였어요. 그 추운 날 집에 가지 못하면서 신문사에서 밤샘농성도 했지만, 1990년 1월에 집단해고를 당하게 됐죠.”

해직 기자들은 도민을 주주로 하는 ‘제민일보’를 세웠다. 김 이사장과 동료들은 퇴직금과 사비를 털어 새 신문사 창간에 힘을 보냈다. 1990년 6월 제민일보 창간과 동시에 4·3 취재를 다시 시작했다.

창간 기획으로 시작된 ‘4·3은 말한다’ 시리즈는 10년간 총 456회에 걸쳐 연재됐다. 당시 기획물 제목은 송상일 편집국장 뜻이 반영됐다고 한다. 이 기획 취재로 1993년에는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시리즈 이름을 보면 4·3은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야. 당시 편집국장이, 아직 4·3 진상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뭘 안다고 4·3‘을’말한다고 이야기하냐, 우리는 진실 그자체를 밑바닥까지 탐구하고, 4·3 그 자체가 팩트로서 말하도록 하자라고 했지. 그래서 4·3‘은’ 말한다가 된거예요. ”

우리는 진실 그자체를 밑바닥까지 탐구하고, 4·3 그 자체가 팩트로서 말하도록 하자라고 했지. 그래서 4·3‘은’ 말한다가 된거예요.

4·3은 여전히 금기였다. 처음 본 기자를 반기던 주민이 ‘4·3’이라는 말만 꺼내면 신발도 벗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연좌제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김종민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김종민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처음 주민들은 기자를 의심했지만, 자신들의 사연이 ‘왜곡’ 없이 신문에 실리는 것을 확인하면서 추가 제보가 이어졌다.

김 이사장은 취재에 임할 때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지 말자고 결심했다. 대학 때 배운 역사관, 철학관은 다 배제했다. 그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취재 과정은 검증의 연속이었다. 유족의 구술과 구술을, 구술과 사료를, 사료와 사료를 교차 검증했다.

“기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진실을 수면 위로 드러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때 발행 부수가 꽤 됐고 기사에 누군가의 아버지, 삼촌 이름이 나오고 하는데 오류가 있었다면 시리즈가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검증의 돌다리. 검증에 검증을하고 ‘이게 이랬을 것이다’ 정황상 분명하다 할지라도 이게 사료로 정확한 뒷받침이 안 된다면 쓰지 않았지.”

관계 당국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경찰이 보도 내용을 조사하는 전담반을 만들고 뒷조사를 시작했다. 김 이사장이 취재를 위해 제보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경찰을 만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소속 기자였던 김종민(맨 왼쪽) 이사장이 제주 4·3연구소와 공동으로 다랑쉬굴을 조사하는 모습. /김종민 제공
제민일보 4·3취재반 소속 기자였던 김종민(맨 왼쪽) 이사장이 제주 4·3연구소와 공동으로 다랑쉬굴을 조사하는 모습. /김종민 제공

“취재반은 철저하게 검증한 내용만 보도했고, 증언을 대충 뭉개면서 쓰지 않고, 증언자의 이름, 나이, 주소를 ○○리까지 쓰고, ‘쿼테이션 마크’(인용부호) 속에 담았지. 그럼 경찰이 그 사람에게 가서 ‘당신이 진짜 김 기자한테 그런 말을 했느냐’라고 묻고, 심지어는 경찰이 ‘호적을 떼어왔는데 당신 동생이 호적에는 없는데 왜 기자한테 그런 말을 했냐’고 추궁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출생 즉시 호적 신고를 하던 때가 아니었거든요. 보도 이후 주민들이 사실 관계를 검증해줄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검찰과 경찰도 검증을 해준 거지.”

제주 4·3평화공원에는 희생자 이름이 담긴 ‘각명비’가 설치돼 있다. 각명비에 세겨진 이름을 살펴보다보면 이름도 없이 ‘○○○의 자 3세’라고 쓰인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각명비를 따라가다 보면 수의(壽衣)가 그려진 비석 ‘귀천’이 나오는데, 수의 크기는 어린 아이, 청소년, 성인 크기로 제작됐다.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희생자들의 혼을 달래기 위한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한 비상계엄은 제주도 사람들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고 한다.

“제주 사람에게 계엄은 각별한 문제예요. 1990년대 취재를 할 때만 하더라도 한글을 모르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계엄 때문에’ ‘계엄 시국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고 했거든. 그러니까 이번에 계엄 사태 때 제주도민이 느끼는 트라우마는 장난이 아닌 거지. 제주도 사람에게 계엄은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여도 되는 제도쯤으로 여겨졌어요. 당시 군이 사법·행정을 다 장악하고, 민간인도 군 재판에 회부되며 실제로도 그렇게 집행이 됐고.”

제민일보는 1997년 4월1일자 1면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8년 11월27일 선포한 계엄이 불법이었다는 내용의 기사(‘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를 실었다. 4·3취재반은 제주도에 내려진 계엄령이 계엄법 제정·공포(1949년 11월 24일)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계엄 선포 내용이 담긴 ‘대통령령 제31호’ 자료가 그 근거가 됐다.

이 전 대통령 양아들 이인수씨는 “당시 효력을 갖고 있던 일본의 계엄법에 의해 선포된 것이므로, ‘법적 근거 없이 선포됐다’는 보도는 잘못”이라고 주장하며 제민일보를 상대로 3억원의 손해배상과 정정보도 청구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은 2001년 대법원이 이씨의 청구를 기각하며 마무리됐다. 공판에는 당시 제민일보 기자였던 김 이사장도 참석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을 보도한 제민일보를 상대로 이인수(이 전 대통령의 양자)씨가 제기한 명예훼손 ·정정보도 청구 소송 1심(2000년 7월 20일)에서 제민일보가 승소하자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제주 4·3 희생자 유족들이 환호하는 모습. /김종민 제공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을 보도한 제민일보를 상대로 이인수(이 전 대통령의 양자)씨가 제기한 명예훼손 ·정정보도 청구 소송 1심(2000년 7월 20일)에서 제민일보가 승소하자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제주 4·3 희생자 유족들이 환호하는 모습. /김종민 제공

2000년엔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됐고, 진상조사 보고서가 작성됐다. 김 이사장은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진상보고서 집필에 참여했다. 2003년에는 추가 조사 내용과 구체적 피해 실태가 담긴 추가 진상보고서가 나왔는데 마을별 희생자, 집단학살 사건, 행방불명된 희생자 유해 발굴 등의 내용이 담겼다.

제주 4·3평화공원 내 설치된 희생자 위패 봉안소에서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제주 4·3평화공원 내 설치된 희생자 위패 봉안소에서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제주시 봉개동 한라산 중턱 39만5천380㎡의 넓은 면적에 조성된 제주 4·3평화공원에는 희생자들의 위패를 모신 봉안소, 추모승화 광장, 행방불명 표석 등이 위치해 있다. 당시 제주 인구가 27만여명이었는데, 희생자는 3만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원에 자리한 기념관 내 전시실에는 김 이사장이 취재했던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이 그대로 담겨있다. 전시실을 조성할 때도 설명 문구를 기사 형태처럼 헤드라인, 중간제목을 뽑아 가독성을 높였다.

“하도 취재 내용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의 군번을 아예 써 넣었죠. ”

‘폭도’와 ‘국가유공자’ 토벌대는 삼양리의 한 청년이 학살극을 피해 피신하자 그의 아내와 부모는 물론 처가 식구들을 ‘폭도 가족’이라며 몰살시켰다. 은신처에서 나온 그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 그의 군번은 0310413이다.

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 중

제주 4·3 당시 희생자 유족 증언 등이 담긴 기록물은 지난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인천 5.3 민주항쟁과 제주 4·3

지난해 6월 제주4·3평화재단은 인천시교육청과 업무협약을 맺었다. 앞서 인천시교육청이 지난 2023년 11월 제주교육청과 역사·평화교육 활성화를 위해 업무 협약을 체결한 연장선이었다.

김종민 이사장에게 자신이 학창시절을 보낸 인천의 학생들이 제주도와 제주 4·3을 배우고, 제주 학생들이 인천에서 5·3민주항쟁을 배우는 것은 남다른 의미다.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한 제주 4·3에 대해 그동안 이것을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시도가 많았기 때문에 국민들이 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4·3을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해 전국의 교육청과 MOU를 체결해오고 있는데, 인천은 제가 자랐던 곳이기 때문에 아주 각별했죠.”

2023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법 개정으로 인천 5·3민주항쟁이 민주화 운동으로서 법적 지위를 획득했지만, 아직 이를 잘 모르는 시민들도 많다. 김 이사장은 제주 4·3과 인천 5·3 민주항쟁의 의미를 계승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평화로운 삶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거든요. 1987년도 1월에 박종철군이 고문치사 당하고, 많은 시민이 들고 일어나서 겨우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거예요. 과거와 동떨어져 현재가 있는게 아니고 미래 역시도 현재와 동떨어져 있는게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를 잊어서는 안 돼요. 얼마 전 불법적 계엄이 선포됐을 때 많은 시민이 위협을 무릅쓰고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갔고, 투입된 군인들도 소극적으로 임했죠. 이것이 바로 한강 작가가 말한 과거가 현재를 구하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왔던 거구나 싶습니다.”

이 교류를 통해 상반기에는 인천지역 학생들이 제주 4·3 평화 기념관을 방문하고, 하반기에는 제주지역 학생들이 인천으로 와 교육청이 운영 중인 난정평화교육원을 방문하고 있다.

김 이사장의 부평고 선배인 도성훈 교육감은 “아이들이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했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체험으로 느낄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교류였다”면서 “5·3에 참여했던 김 이사장이 제주 4·3과 인천 5·3의 다리 역할을 하며 인천과 제주와 연결 관계를 확장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인천의 5·3항쟁이 6월 항쟁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가 군사 독재 정권으로부터 민주화를 쟁취해가는 맥락에서 의미를 찾고, 아이들이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넘어 세계 시민적 가치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참극 극복하고 살아내준 사람들이 끝내 아름다운 제주 공동체를 복원시킨거죠. 어르신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제주 공동체의 강인한 생명력 ‘제주 4·3’

김종민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김종민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2025.5.15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평화공원에 들어서면 돌담이 둘러싸고 있는 조형물이 보인다. 어린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남편을 잃고 도망가던 중 눈보라에 뒤덮이는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김 이사장은 이 조형물을 보며 어린 시절 참혹한 일을 겪은 유족들을 생각한다고 한다.

“제주 4·3 희생자 유족 중에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분들이 많은데, 심지어 그 어린 아이들을 앞에 세워 놓고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총살할 때 만세를 부르도록 시킨 일도 있었다고 해요. 7살 때 부모 돌아가시고, 집은 깡그리 불에 탔는데 어떻게 살았겠어요. 죽기 살기로 산 거야. 그 분들 증언을 들어보면 원시 시대처럼 나뭇가지를 꺾어 얼기설기 놓고 지푸라기를 얹어 머물 곳을 겨우 마련했던 거야, 강한 비바람에 오면 그 안으로 바닥이 물로 흥건해지고, 그렇게 버틴 사람이 지금 여든이 훌쩍 넘었거든요. 그래서 어르신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이들이 좌절하지 않고 살아줘서 그 어린 아이들이 살아남아 자라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끝내 아름다운 제주 공동체를 복원시킨거죠.”

제주 4·3 희생자들의 목소리가 세상밖으로 나오도록 노력한 김종민 이사장은 이제 제주 4·3이 가야할 방향을 이렇게 제시한다.

“제주 4·3때 그 시절 남성들의 한 세대가 사라져버릴 정도의 대규모 학살극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참극이지만, 이걸 극복해 낸 제주도민의 삶은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생각해요. 이들이 ‘평화’ ‘인권’의 정신을 심화시켜왔다는 것이 자랑스럽죠. 평화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민들의 에너지를 느끼고 갔으면 합니다.”

■ 약력

1961년 제주 출생

1974년 인천부평서초 졸업

1977년 부평중 졸업

1980년 부평고 졸업

1987년 고려대 사학과 졸업

1987년~1990년 제주신문 기자(문화부, 4·3 특별취재반)

1990년~2000년 제민일보 기자(정치부 차장, 4·3 특별취재반)

2000년~2013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전문위원

2014년~2016년 제주 4·3평화재단 이사

2016년~현재 제주 4·3희생자유족회 자문위원

2017년~2018년 제주 4·3기념사업위원회 공동대표

2018년~2019년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회 위원장

2018년~2023년 제주4·3평화상 실무위원회 위원장

2021년~2023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보상심의분과위원회 위원장

2021년~2024년 5·18기념재단 이사

2021년~현재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추가진상조사분과위원회 위원

2024년~현재 제주4·3평화재단 제9대 이사장

■ 수상

1993년 제25회 한국기자상 ‘4·3은 말한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