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안방극장을 주름잡았던 '두 얼굴의 사나이'가 한층 커지고 강해진 모습으로 대형 스크린에 나타난다. '헐크'(4일 개봉)는 60년대 마블 코믹스의 인기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당시 브라운관에서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던 만화적 상상력이 기술적 진보에 힘입어 고스란히 재현됐다.

상처를 즉시 아물게 하는 비밀 연구를 수행하던 데이비드 배너(닉 놀테)는 군수뇌부로부터 실험 중단 명령이 내려오자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몸에 변이유전자를 주입한다. 양부모 밑에서 자란 그의 아들 브루스 배너(에릭 바나)는 여자친구인 베티 로스(제니퍼 코넬리)와 함께 인체의 자연치유 능력을 연구하다가 실수로 감마 방사선에 피폭되고 만다. 치명적인 사고였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오히려 몸 속에 든 변이유전자가 괴력을 만들어낸다.

이제부터 화만 나면 골리앗으로 변해 보이는 것마다 때려 부수는 헐크의 활약이 시작된다. 데이비드 배너를 교도소에 수감했던 베티의 아버지 로스 장군(샘 엘리엇)은 군대를 동원해 그를 잡으려 나서고, 브루스의 라이벌인 글렌 탈봇(조시 루카스)은 거액의 돈벌이를 꿈꾸고 헐크의 세포조직을 떼어내려고 한다.

헐크는 초능력을 가진 인물이지만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처럼 정의를 위해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프랑켄슈타인이나 킹콩처럼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브루스의 주변 인물도 베티를 제외하면 모두 화를 돋우어 헐크로 변하게 만들뿐이다.

관객들은 거대한 근육질의 푸른색 괴물이 천장과 벽을 부수고 집을 뛰쳐나오는 모습이나 탱크 포신을 잡고 빙빙 돌리며 해머 던지기처럼 날려버리는 광경을 숨죽이며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헐크는 137분의 러닝타임 가운데 40여분의 시간이 흐른뒤에나 만날 수 있다. 더구나 헐크가 나온다고 해서 반가워 할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초반의 팽팽하던 긴장감은 헐크의 등장으로 갑자기 풀려버린다.

TV 시리즈처럼 차라리 보디 빌더를 대역으로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으로 무장한 헐크의 모습이 만화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와호장룡'으로 스타감독 반열에 오른 대만 출신의 리안(李安) 감독은 할리우드와 타협하면서도 독특한 연출솜씨를 과시하며 자신의 낙관을 찍었다.

한 화면의 배경과 인물이 순차적으로 바뀌거나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하학적 무늬의 화면을 거쳐 다음 장면으로 이동하는 기법은 마치 만화책 다음장을 넘겨볼 때처럼 묘한 기대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보다 못한 법. 만화책을 연상시키는 화면분할기법 등을 너무 빈번히 사용해 신선하다는 느낌보다 잔재주를 펼쳐보인다는 인상을 남긴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