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독립투사 가운데 누가 가장 많은 전투에서 가장 많은 일본군을 죽였는지러 한번 따져봅시다.』

   金佐鎭, 洪範道라는 걸출한 항일영웅의 그른에 가려 일반인들은 이름을 한번쯤 들었을까 말까한 양세봉 장군(1896∼1934년)을 연변대 민족연구소의 權笠전교수는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梁장군은 평안북도 철산출신으로 1917년 생계해결을 위해 가족과 함께 중국 요령성 홍경현 으로 건너가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농사를 짓다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까지 부임한 입지전걱인 인물이다.

   일제와의 싸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평민 출신 장군이기에 사회주의 체제으 중국 연변 조선족에게는 더욱 특별하게 부각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군은 지난 62년 한국정부에서도 독립유공자로훈장을 받은 잘 알려려지지 않은 항일영웅임에 틀림없었다.

   중국 요령성 신빈현 淸왕조를 세운 만족(滿族) 누루하치의 출생지이자 조선들을 모신 청영릉(淸永陵)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한국의 군·읍정도에 불과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관광과는 전혀 무관하게도 독립을 위해 목숨걸고 피를 뿌린 우리 선열들의 한(恨) 서려 있었으며 이들을 영도해던 梁장군의 기개가 있었다.

   취재팀은 당시 무수한 항일열사들이 명멸했던 이곳 신미현을 지난 11월을 찾았다.

   수령 2백∼3백년은 족히 됨직한 신빈현 북산(北山)의 고수(古樹), 일본군과 무장항쟁을 하다 포로가 됐던 조선인들을 일제가 목매 살해했던 곳으로 나라잃은 백성들의 피울음을 간직한채 세월의 질곡을 의연하게 버터내며 암울했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북한산앞쪽에서 신빈현 시내를 가로지르면 곧바로 독립군과 일본군이 수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남산(南山)이 마주한다.해발 3백∼4백m쯤인 이곳에서는 신빈시내가 한눈에 조망대 당시 전투지로는 그만이었을 법 하지만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흔적은 간데없다.

   산은 개간되 옥수수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신빈시내에는 개방의 물결을 타고 5층 이상 고층건물들이 들어섰다.

   연변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강용권교수(55)는 『남산은 1932년 신빈현을 사이에 두고 일본군과 梁장군휘하 조선혁명군간 밀리는 게릴라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대표적 전투지로 같은해 5월과 6월 두차례전대를 기습공격해 대승을 거둔 전투로 이 전투가 시발점이 돼 신빈전투등 신빈대첩이 일어나게 된다.

   韓·中 연합군을 조직해 2백여차례 항일전투를 치르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했던 梁장군은 1934년 9월19일 일본영사관의 지시로 일본관동군 특무기관원 박창해(朴昌海)의 사주를 받은 중국인 압동양이 자신의 부대와 연합하자는 꾀임에 빠져 환인현쪽으로 가다 왕청문(旺淸門) 향수하자향 소황구천 옥수수밭에서 저격을 당해 39세의 처절한 생을 마감했다.

   양세봉이 사망하자 중국인들은 『아 하늘에서 하나의 거성이 떨어졌다』며 애도했다고 한다.

양장군에 의해 수많은 패전을 거듭하던 일제는 양장군 부하들이 몰래 묻어두었던 시신을 파헤쳐 작두위에 올려놓고 조선인들 앞에서 목을 베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후 목없는 시신은 1962년 북한당국과 그의 혈육들에 의해 묘향산에 안장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항일영웅 양세봉은 사망이후 세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설처럼 전해오다가 광복 50주년인 지난 95년 8월29일 조선혁명군 사령부 근거지였고 조선혁명군이 인재를 양성하던 신빈현 왕청문화홍학교(지금은 조선족 소·중학교)내에서 양장군의 전적을 기리는 동상제막은 신빈현 문화관 관원 金正草씨 등에 의해 처음 제기돼 93년 崔善柱씨(前신빈현정부 주석)등 신빈현 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의회에 의해 적극 추진됐다.

   全씨는 『폭 1백59cm, 높이 6m규모의 석상은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조각가인 전기봉(田基鋒)씨가 작품을 제작하고 소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들이 십시일반으로 갹출, 인민폐로 총 17만圓이 들어갔다』며 『아직도 6만圓의 빛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全씨는 올해에는 양장군이 희생된 지점에 기념비를 세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루가 다르게 개발되면서 앞으로는 선열들의 유적지 지점조차 확인하다가 난망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전씨는 『앞으로 양장군의 기념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갈 것』이라며 비용문제에 있어서는 『조선족들의 뜻이 모아질 것』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함께 답사에 나섰던 무순시(撫順市) 사회과학원 신빈 만족(滿族)연구소 曺文奇 소장은 양장군이 희생된 지점에 서서 감회를 감추지 못하고 당시 중국인들이 양세봉을 기리며 불렀던 노래를 읊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