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은 8월14일 낮 신라호텔에서 제7차 남북장관급회담 마지막 전체회의를 열고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군사적 보장조치를 시급히 취하기로 했다.

서해교전 이후 교착상태에 빠졌던 남북 대화·교류가 7차 남북장관급회담을 계기로 10월말까지 숨가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제8차 남북장관급 회담은 10월19일부터 22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키로 합의했다.

이처럼 남북간 대화와 교류협력은 휴전협정(53년 7월)이후 지난 반세기동안 줄기차게 이어졌다. 통일이라는 공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남북간 접촉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통일의 길로 한발 한발 이동하고 있다.

남북간 대화는 70년대들어 본격화 됐다. 70년대는 남북적십자 회담을 비롯 남북조절위원회회의, 남북탁구협회회의 등이 잇따라 개최돼 상호간 격의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특히 지난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통일의 꿈은 한층 무르익어갔다.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5월2일부터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했으며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5월29일부터 6월1일까지 서울을 방문, 이후락 중정부장과 회담을 진행했다.

양측간 회담을 통해 공동선언문이 완성됐다. 선언문에는 통일을 위해 자주적 평화적으로 추진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또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서울과 평양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합의했다.

80년대의 남북대화는 계층이 다양해진 것이 특징이다. 남북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접촉을 시작으로 남북체육회담, 로잔체육회담, 남북적십자회담, 남북경제회담,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 등 전방위적인 교류로 확대됐다.

특히 지난 84년 서울지역 수해를 입을 당시에는 북측에서 수해물자 인도·인수와 관련한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을 갖고 쌀 등 수해물자가 처음으로 남한땅을 밟았다.

또 85년에는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도 이루어졌다. 30년만의 남북이산가족 상봉으로 서울을 눈물의 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80년대까지의 남북회담은 다소 정치적인 색채가 가미돼 남북간 실질적인 교류의 폭이 넓지 않았다.

90년대는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는등 남북간에 급격한 교류가 봇물을 이루었다. 남북고위급 회담을 시작으로 남북체육회담, 남북적십자 실무대표회담,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접촉,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 남북간 북경회담, 대북구호물자 전달을 위한 남북적십자 대표회담, 남북당국대표회담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는 또 경제우위를 앞세운 남한측의 적극적인 대북교류의 시기였다. 90년대 초반에는 북경아시아경기대회 단일팀 구성을 위한 접촉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후 탁구와 축구에서 단일팀을 구성해 세계대회에 출전했으며 탁구는 세계대회를 제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남북간 실질적인 교류협력이 급물살을 탄 것은 김대중 정부들어 대북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면서 부터다. 지난 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등 가장 왕성한 대북교류를 추진했다.

김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필두로 남북경제협력기반조성, 남북인적왕래 확대, 경수로 건설본격추진, 남북교역증대, 이산가족상봉, 한반도 평화기반조성 등 다각적인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98년에는 대북구호물자 제공을 위한 남북적십자 대표회담을 시작으로 민간인들도 처음으로 북한땅을 밟았다.

고(故)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이 6월16일 소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북한을 방문한 후 11월18일에는 금강산 관광선이 첫 출항, 민간인의 북녘땅 밟기가 시작됐다.

남북간 화해 무드는 이듬해 서해상에서 남북간 연평해전(99년 6월15일)을 겪으며 급랭했으나 연말 민족통일음악회와 남북통일농구대회를 개최하며 해빙무드로 전환됐다.

새천년 첫해인 2000년 6월13일에는 김 대통령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5일까지 정상회담을 갖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양국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간 대화는 분야별로 7차례의 장관급 회담을 비롯,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회담,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국방장관회담, 경제협력실무접촉, 남북임진강수해방지실무협의회 등 분야별 교류협력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