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42] 강화석·강준 부자가 설립한 인천박문협회는
'독립협회 인천항지회'…문명개화의 산실
입력 2006-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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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박문협회는 1898년 6월8일 결성됐다. 1898년 6월25일 독립협회의 자매단체중 가장 큰 규모와 활동을 자랑하는 협성회(1896년 11월30일 창립)에서 발행하는 순한글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는 당일 잡보란에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소식을 최초로 자세히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인천박문협회는 관보와 각처의 신문 및 시무상에 유익한 서책을 구비해 놓고 모든 회원들이 수시로 모여 강론하고 연설해 지식과 학문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됐다. 회원은 설립되자 순식간에 100여명에 이르렀다.
1898년 7월4일 '박문협회 회원의 연설'이라는 논설(독립신문)에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취지는 외세의 침탈 아래 놓여있는 대한제국을 일으켜 세우는 애국자강운동 노선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후 1898년 10월15일 인천박문협회가 독립협회의 인천항지회로 정식인가 된다.
문명개화를 지향하는 인천박문협회의 자강운동은 자연스럽게 교육계몽사업으로 이어졌고 협회창설 한달여만에 회관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야간영어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이 사립영어학교는 1900년에 설립된 인천항사립박문학교(현 박문초등학교)의 모태가 된다. 이 학교의 교사로 참여했던 강준은 후일 인천항사립박문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며 현재 박문초등학교의 학교명칭은 독립협회의 자매단체로 활동하던 인천박문협회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인천박문여자중학교는 박문초등학교에 이어 세워진다.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강화석으로, 그는 아들 강준과 함께 인천박문협회의 운동노선을 정했고 그를 중심으로 인천해관과 외국상사, 교회와 관공서 등에 종사하는 인천의 신지식인들이 모여 다양한 계몽운동을 펼친 단체가 바로 인천박문협회다.
그러나 인천박문협회는 1898년 12월말에 강제해산된 독립협회운동의 운명과 함께 신문지상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박문협회의 '박문(博文)'이란 이름은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의 '박학어문(博學於文) 약지이례(約之以禮)'란 구절에서 차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