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향년 85세. 정치역정 50여년 동안 민주화·국민화합·남북화해에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이 안타깝게 스러져 영면에 들었다.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인동초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끌어 냈다. 대통령 재임기간 6·25이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남북화해협력시대를 열었다.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큰 어른으로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파란만장한 영욕의 삶이었다. 59년 인제 보궐선거와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4·19 혁명으로 이듬해 다시 치른 인제 보선에서 첫 금배지를 달게 된다. 하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3일만에 의원직을 잃게 된후 야당 정치인으로서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숱하게 옥고를 치르게 된다. 도쿄 피랍, 군사재판에 의한 사형선고 등 죽을 고비도 다섯 차례나 넘겼다.
97년 4수끝에 수평적 정권교체로 통치권자에 오른 그는 국제통화기금 금융위기 극복, 남북 정상회담, 노벨평화상 수상 등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한 그도 정치과정에서 숱한 비난을 받은 것 또한 사실이다.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한 분당, 정계 은퇴와 복귀 등 개인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야권을 분열시키고 정치발전을 가로 막았다는 호된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 재임기간에는 친인척 비리 연루사건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기도 했지만, 민주화 운동의 족적과 대통령으로서 남북 화해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일관된 정치적 신념과 그를 실현하기 위한 리더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감정을 없애 국민화합을 이루겠다는 평생의 소신을 달성하는데 실패한 것은 김 전 대통령 개인이나 국가적으로도 큰 아픔이다. 오히려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영남 호남 충청으로 갈리는 등 지역주의가 더욱 심해 최악의 상황에까지 몰리기도했다. 이는 집권 초기 소수 정권이라는 약점으로 각종 개혁을 소신대로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 하겠다. 특히 측근들의 '공직 취임 자제' 선언과 인물난으로 민의 수렴과 '소통'에 공백이 생기면서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퇴임후에도 대북송금 특검이 시작되면서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에 흠집이 났다. 하지만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했던 퇴임인사처럼 전직 대통령으로서 북한 핵사태를 포함해 남북문제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등 소신을 펴왔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정치적 사회적 화해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젠 그의 서거로 그가 이루려던 남북화해와 통일은 남은 자의 몫이 됐다. 여야와 보혁 모두는 자숙하고 이 시대의 큰 스승이 남긴 이 시대의 유업을 이루는데 필요한 묘책을 찾고 실천하는 데 함께 나서야 한다. 다시한번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에 깊은 조의를 표하며 유가족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정치사의 큰 족적
입력 2009-08-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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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9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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