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일본 요코하마/김창훈기자] 낙후한 구도심을 밀어버리고 초고층 아파트를 세우는 것이 그동안 우리의 도시재생이었다. 최근에야 구도심이 간직한 역사와 문화 등을 보전·계승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낡은 하드웨어를 부수고 새 것을 만드는 작업만이 도시재생의 정석은 아니다. 과거의 유산을 현 시대에 통할 수 있는 가치로 다듬고 발전시켜 구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 오히려 도시재생의 본질에 가깝다.

■ 낡은 것의 재창조

▲ 도로 개설 때문에 원형 그대로 이전 보존된 요코하마의 옛 제일은행.
가나자와 시민예술촌의 전신은 방적공장이다. 지난 1917년 설립된 대화방적(大和紡積)은 지역의 주력공장으로 80년간 운영되다 문을 닫았다.

이후 재난시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을 모두 철거할 예정이었지만 철거 1주일 전 방문한 야마데 시장이 "이건 부수기 아깝다"며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낡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방적공장은 보수공사를 거친 뒤 1996년 시민예술촌으로 거듭났다.

시민예술촌은 말 그대로 누구나 찾아와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뮤직공방·드라마공방 등 각 공방에는 무대시설과 관련 설비가 갖춰져 있다.

이용을 원하는 시민이나 단체는 사전에 선착순으로 예약을 하면 된다. 물론 비용은 민간시설보다 훨씬 저렴하다. 시설이용률은 거의 100%에 달할 정도로 호응이 높다. 연간 15만∼20만명이 찾아오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용자들이 몰리며 가나자와를 대표하는 문화시설로 자리를 잡았다.

낡은 건물의 재활용에 성공한 사례는 개항장인 요코하마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코하마항 인근의 붉은벽돌창고 두 동도 그렇다. 1911년에 세워진 한 동은 쇼핑센터가 임대해 운영중이고, 1913년에 지어진 한 동은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무런 구조물없이 그대로 내버려둔 두 창고 사이의 공터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명소가 됐다.

이밖에 요코하마는 개항장이란 역사적 특성을 살려 옛 은행 건물들을 활용한 '뱅크아트(Bank Art)'로도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 마치즈쿠리의 대명사, 모토마치

▲ 방적공장을 리모델링한 가나자와 시민예술촌.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는 '거리(또는 마을) 가꾸기'란 의미다. 낙후한 생활환경을 주민 스스로 개선하려는 자치활동으로 1960년대 후반 시작됐다.

이 마치즈쿠리가 제대로 빛을 내고 있는 곳이 요코하마의 150년된 상점가 모토마치다.

모토마치의 역사는 일본의 개항인 18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항과 함께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가구 수리점이 모토마치에 생겼고, 이후 일본인 특유의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식 의류점을 비롯한 다양한 상점이 들어서게 됐다.

모토마치의 마치즈쿠리는 상점주 240여명으로 구성된 협동조합 주도로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총 길이 약 600m인 모토마치내 상가들은 자체 협정에 따라 건물을 신축할 때마다 건축선을 후퇴시켜 보행 공간을 넓혔고, 전봇대를 모두 지하케이블로 바꿨다. 애견급수대를 만들고, 비와 눈이 내려도 우산없이 쇼핑이 가능하도록 건물 사이에 캐노피를 설치하는 등 최고의 쇼핑에 초점이 맞춰진 마치즈쿠리다. 이는 '요코하마 패션1번지'란 타이틀을 유지해야 한다는 위기감에서 시작된 상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이었다.

그 결과 연간 850만명이 방문하고, 상점들의 총 매출액은 500억엔에 달하는 등 150년간 모토마치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 유리공예로 되살아난 나가하마

▲ 요코하마항 인근에 1911년 세워진 붉은벽돌창고는 훌륭한 관광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시가현 북동부의 나가하마는 임진왜란의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체계적으로 개발한 곳이다. 하지만 지금도 인구가 채 10만명도 살지않는 소도시이고, 한때는 관광객이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던 별볼일 없는 지역이었다.

나가하마 중심가의 대형마트 2개가 1974년 교외로 이전하는 등 공동화가 도심 몰락의 원인이었다.

도심 재생의 필요성은 커졌고, 나가하마시와 상공회의소, 상점 주인들은 협력기구를 만들어 대기업 자본이 아닌 자신들의 힘으로 관광 중심의 마치즈쿠리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1989년 탄생한 것이 지자체와 민간이 합작한 '구로카베(黑壁)' 주식회사다. 이들이 인수한 약 100년된 은행지점 건물 외벽이 검은색이어서 구로카베라는 명칭이 붙었다. 주력 아이템은 당시 일본에서는 희소했던 유리공예. 유럽의 기술을 들여와 구로카베를 중심으로 유리공예가 시작됐고, 주변의 문닫은 건물들을 사들여 유리공방·유리공예체험장·레스토랑·찻집·토산물점 등을 잇따라 열었다.

자발적인 노력은 열매를 맺었다. 유리공예가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현재는 연간 200만명 이상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관광도시로 변모했다.

돔테니스장 건설과 종합대학 유치, 교토와 오사카에서 직통 철도노선을 끌어온 것 등도 민관 협력의 결실이다. 덕분에 나가하마의 400년된 전통축제 '히키야마 마츠리'도 덩달아 부흥했다.

■ 인터뷰 / 야마다 요시히토 모토마치협동조합 사무국장

"잘 안될 때 재생에 나선다면 이미 때를 놓친 것입니다."

모토마치협동조합의 야마다 요시히토 사무국장은 마치즈쿠리의 시점을 이렇게 강조했다. 그는 "계속 선두를 유지한 모토마치여도 지속적인 재생사업으로 항상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며 "이미 무너진 도시를 재생하는 것은 잘 될 때에 비해 최소 다섯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모토마치협동조합이 정한 자체 협정은 상인들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편이다. 예를 들면 현수막 설치와 일명 '찌라시' 배포, 호객행위 등이 절대 금지지만 상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따르고 있다. 야마다 사무국장은 "이런 점들 때문에 오히려 고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외국으로부터도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것 같다"며 "지난해에는 평택시에서 모토마치를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협정은 만드는 것보다 얼마나 잘 지켜가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모범적인 모델이 바로 모토마치가 아닐까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