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인은 스님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사뭇 깊었다. 그런데 방문 앞에 웬 신발이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는 아내의 신발 다른 하나는 하얀 남자 고무신이었다. 창에 구멍을 내고 들여다보니 아내는 까까머리 중을 꼭 껴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상인은 화가 불처럼 치밀어 올라 부엌으로 가서 식칼을 가지고 뛰어 나왔다. 막 방문을 들어서서 식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산길에서 만난 스님의 말이 생각났다. 상인이 씨근덕거리며 스님의 말을 읊조리며 왔다 갔다 하는 소리에 아내가 깨어 밖으로 나오며 반갑게 맞이했다. 이윽고 중도 뒤따라 나오며 "형부! 오랜만에 뵙습니다"하며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까까머리 중은 바로 출가한 상인의 처제였던 것이다.
장황하게 언젠가 읽었던 얘기를 적었다. 분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얼마 전 개각으로 청문회가 열리기 전 경찰총장 후보의 동영상이 공개되어 그 사람이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다. 천안함 폭파사건 유족들의 분노의 표현에 대하여 동물이 울부짖는…등의 표현으로 언론으로부터, 정치권으로부터 몹시 비판받았다. 특히 유족들에게는 씻지 못할 상처를 주어서 결국은 공개적으로 사과하였다. 필자는 천안함 유족들의 분노와 슬픔의 표현에 대해서 폄하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다. 더군다나 경찰총장 후보자의 발언에 대해서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 즉 우리들의 분노의 표현에 대해서는 정말 비판하고 싶고 창피함을 느낀다. 두발을 쭉 뻗고 맨바닥에 다리와 발을 막 문지르고 발버둥치고 몸을 뒤흔들고 입에서는 거침없는 저주와 한의 말이 마구 뱉어지고…물론 그 정황을 보면서 어찌 그렇게 분노를 나타내는 그들과 필자가 똑같을 수 있을까? 백번 이해하지만…정말 때로는 그러한 장면에 눈을 돌리고 싶고 저렇게 꼭 표현해야할까? 솔직히 그러한 방식의 분노의 표출에 대해서는 공감이 가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정말 안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달 전 부산의 사격장 화재로 일본 관광객 8명이 사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일본인 관광객 사망자의 유족들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적이 있다. 정말 절제된 분노와 슬픔의 표출을 그들은 보여 주었다. 그 유족들의 모습을 보며 필자는 너무나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과 철학을 '탈무드'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탈무드'를 통해서 인간의 됨됨이가 가르쳐지고 교육되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들은 단적인 표현으로 세계를 유대인들이 지배한다고까지 표현한다. 한국의 학부모들도 유대인 학부모들과 비견될 정도로 교육열이 높다고 인정되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의 '버락 오바마'대통령도 교육에 대하여 연설할 기회가 있으면 '한국'을 인용하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차이는 유대인들은 자식을 키울 때 히브리어로 '키스' '코스' '카스'를 가르치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키스는 술을 먹고 난 후 어떻게 행동하는지. 코스는 돈을 어떻게 쓰는지. 카스는 분노를 어떻게 삭이는지를 가르친다고 한다. 필자도 한국인이나 과연 얼마나 많은 학부모들이 이렇게 자식을 가르치는지? 정부에서는 마치 선진국 대열에 한국이 곧 올라갈 것 같이 떠들어댄다. 과연 선진국은 무엇일까? 돈만 벌면 될까? 선진국이라 평을 듣는 나라들을 봐라. 특히 그들은 분노를 어떻게 표출하는지? 최소한 이 것 하나만이라도 절제할 수 있는 나라가 우선 되어보자. 그 다음 선진국이 어떠니 떠들어 보자. 선진국 한참 멀었다. 선진국이 말로 구호로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