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산리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죽산리 봉업사지에 있으며 오층석탑은 보물 제435호로 고려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간지주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9호이다. 봉업사지는 고려때 태조의 진영을 모셨던 국찰로 공민왕이 죽주에 이르러 봉업사에서 태조의 진영을 알현했다고 전해진다.

[경인일보=글┃전상천·민정주기자]길에서 만난 원효는 온 몸으로, 시와 노래로 춤을 춘 이다. 시인 고영섭은 '분황원효'에서 화엄경 십회향품을 주석하던 원효가 시의 연꽃을 피우기 위해 이내 붓을 꺾고 절 문을 뛰쳐 나가 벌판에 법석을 차리게 한 뒤 변문과 탈춤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새벽 문을 열었다고 노래하기도 했다.

'예향의 도시 안성은 이젠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예술 기행지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고은 시인과 유명 드라마 작가 김수현, 영화 '왕의 남자'로 유명한 줄타기 예능보유자 김대균씨 등 안성에 머물거나 지나간 유명 예술인들만 줄잡아 400여명에 달한다. 특히 청록파 시인 박두진 기념비와 조병화 기념관 등 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의 문학을 일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안성맞춤'의 도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역사박물관이기도 하다. 도시 곳곳엔 과거와 현재의 삶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신라 석남사와 고려 봉업사지, 일죽산성, 향교 등 1천년의 역사문화재와 구포동성당과 중앙제일교회 등 근대문화 유산, 죽산향교 등이 고스란히 보전돼 있다. 특히 안성은 칠장사 등 삼절이 불교를, 미리내 성지 등이 천주교를, 100년된 중앙제일교회가 기독교를, 죽산향교 등이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상징하며 한국 정신문화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 천년 역사를 복원하라, 봉업사지(奉業寺址)

여주에서 이천 장호원을 가로질러 안성 일죽에서 공도 방면으로 나아가면 시대의 흐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취재진은 '금강산도 식후경'인지라 전국 쌀중 최고로 손꼽히는 이천쌀밥으로 점심 끼니를 때운 뒤 바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성에 첫 발을 디디면서 마주친 것은 고려시대에 나라 창업의 뜻을 받들던 봉업사지. 지난 1966년 공사 도중 유물이 우연히 발견, 그 가치를 재조명받기 시작했지만 정작 황량한 터만 남아있어 위정자들의 무관심이 이내 미워졌다.

고려 오층석탑(보물 435)과 당간지주, 신라말 석불입상(보물 983), 그리고 동으로 만든 징과 북 모양의 반자(飯子:보물 576)와 촛대 등의 유물로 가늠할 때 폐사되기 전의 봉업사 규모가 매우 컸을 것이라 추정되기만 한다. 이어 죽주산성으로 가는 길목 곳곳엔 미륵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숫자만 봐도 드나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 교통의 요지였는지 이해가 됐다.

따가운 가을 햇빛을 맞으며 올라간 죽주산성은 외성과 내성 복원이 한창이었다. 외성곽에서 용인 방면으로 내려다보니 서울과 충청을 오가는 길목을 지키는 요지였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이 지역이 예부터 국토의 나들목임을 입증해 준다. 멀리 야생꽃의 천국인 용인 한택식물원이 보인다.

▲ 석남사=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20년에 고승 담화덕사가 창건한 절로 영산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계공포를 갖추고 있다.서운산 동북쪽 끝에 있어 남쪽 기슭의 청룡사를 찾는 등산객들이 서운산의 풍취와 함께 즐겨 찾고 있다.

■ 서운산과 안성 삼절 석남사, 청룡사, 칠장사

경기 안성과 충북 진천을 연결하는 길을 따라 올라 서운산 정상 부근 베티고개까지 올랐다. 등산객들은 천년사찰인 석남사를 돌아 올라 서운산 정상, 탕흉대, 좌성사, 은적암, 그리고 세계적인 명품 공연이 돼가고 있는 '바우덕이' 사당이 있는 청룡사까지 간다. 취재진은 서운산 재를 넘는 길을 찍기 위해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울창한 숲에 애를 먹기도 했다.

경기·충북 경계선인 이 도로 바로 아래 있는 진천으로 넘어갔다 베티성지에 들렀다. 조선교구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졌던 마을이고,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토마스·1821~1861)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교리서인 '천주가사'가 탄생된 곳이기도 하다.

시간에 쫓기는 우리는 안성 방면으로 발길을 돌려 680년(문무왕 20)에 담화 또는 석선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사찰 석남사에 들렀다. 천년불사 영산전(보물 823호)과 마애여래입상(경기유형문화재 109호) 등을 둘러보니 한층 유서 깊었다.

이어 인근의 아미산 아랸야에서 혜소국사(972~1054)가 악한 사람 7명을 설법으로 교화시켜 일곱 현인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산과 절 이름을 바꿔 지금의 칠현산, 칠장사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 구포동성당=1922년에 재건된 것으로 한옥의 부재를 이용하여 건립됐으며 근대 한국 천주교성당의 건축양식의 특징인 한국과 서양의 절충식 성당이다.

■ 안성 유기박물관과 근대유산 구포동성당

옛 안성은 안성천을 따라 평택까지였다. 오랜 기간동안 장터로 알려졌던 지금의 안성시내와 맞닿은 안성천 위에 옥천교 인근 나루터로 바다에서 소금 등을 실은 배가 올라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안성천에서 하천 정비 작업 등을 통한 전통 뱃길을 복원하면 평택까지 배가 오갈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옥천교를 지나 안성의 명물인 유기그릇 박물관과 매장을 둘러봤다. 유기엔 우리네 전통을 지켜 온 손길이 물씬 배 있었다. 물건을 구입하러 온 손님들로 복잡했는데 가격도 생각보다 비쌌다.

이어 '베토벤 바이러스' 촬영지로도 유명한 안성 구포동성당으로 향했다. 지난 1985년 경기도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된 이 성당은 파리외 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안토니오 콩베르(한국이름 공안국) 신부가 지난 1900년 안성시 안성동에 도착해 민가를 매입해 창설했다. 성당은 지난 1866년 천주교 박해 때 안성, 죽산, 미리내 등에서 나온 많은 신자들의 순교를 기념했다. 구포동성당은 한옥의 재료인 목조기둥, 서까래, 기와 등을 재료로 해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100년된 안성 중앙제일교회 등은 요즘 말로 하자면 퓨전. 이 또한 안성이 예향의 도시로 불리는데 좋은 재료가 된다. 신·구와 동·서가 용광로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곳. 길을 걷는 여행자들에게 안성은 틀림없이 신선하고 즐거운 여행지다.

▲ 죽주산성=죽산면에 있으며 고려 고종때 송문주 장군이 몽고군을 퇴치, 대승을 거둔 곳이다. 성곽의 둘레는 1천688m로 내성과 외성이 있으며 송문주 장군의 사당이 모셔져 있다.

■ 예인의 고향, 안성객사(安城客舍)

지난 2004년 혜산 박두진 자료실을 개관한 안성시립보개도서관 초입엔 박두진 시비·문학인물 기념비가 있다. '詩는 모든 것 위에서 최고의 비판이자 최고의 도덕적 이상 미학이며 가장 높은 단계의 인간성을 실천해야 한다'고 한 혜산의 번뜩이는 지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

길 하나를 두고 그림같이 자리잡은 안성객사. 원래 안성 읍내의 관아 주변에 있었으나 지난 1932년 명륜여자중학교로 옮겨졌다가 1995년에 해체·수리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고려 때부터 지방관리 등이 머물던 객사가 있었던 안성이라 예술가들의 머무름은 일찍부터 예견된 일이기에 당연한 듯하다. 일찍이 조병화기념관을 비롯, 예술인들이 20여년간에 걸쳐 내려와 서재와 작품실 등을 마련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니 문예의 도시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안성을 떠나며 꼭 뵙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찾아간 시인 고은 사택, 막 출타했다는 말에 이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고은의 노벨문학상 고배, 그를 서포터하지 못한 우리네가 너무 야속했다. 안성은 보물을 안고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진흙속에 묻어뒀다. 2010년 10월 노르웨이 등 국외에서 보물이라고 떠들썩하자 그 집 앞에 언론과 정치인들이 장사진을 친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진┃조형기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