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성행궁=조선의 행궁중 가장 아름답고 규모가 큰 것으로 정조에 의해 576칸 규모로 건립됐으며 일제 강점기 훼손된 것을 2003년 제1단계 복원공사로 482칸이 복원됐다.

[경인일보=글┃김학석·전상천·민정주기자]길이 끝나자 또다른 길이 시작된다.

산을 넘으면 저 먼 곳에 또 산이 보인다. 길은 단 한번도 멈추거나 끊어진 적이 없는, 항상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당나라 유학의 길 종착지에서 원효는 평생을 안고 살았던 부처님의 가르침, 그 참 진리를 깨닫고 또다시 길을 떠났다.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한 채 민중을 위한 대승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고난의 길을 간 것이다.

취재진은 원효 길 끝에서 서 있는 설총을 만났다.

원효가 요석공주 사이에 낳은 아들인 설총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하지만 설총은 아버지를 끝없이 섬겼다. 설총은 경산 초개사에 있는 아버지를 뵙기 위해 맞은 편 산에서 책을 읽으며, 아버지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표하기도 했다. 또 열반한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아버지가 수행한 분황사에 안치하고 지극한 예를 올렸고, 소상이 원효의 아들 설총을 돌아봤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애틋한 사이였다.

불교에서 '효'(孝)란 모든 행복의 근원이다.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는 것은 단지 부모를 잘 봉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참 행복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행복은 곧 나 자신의 행복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는 게 가르침의 요체다.

원효길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화성 용주사와 융·건릉, 수원 화성행궁은 우리나라 '효의 본산'이다. 효의 도시 '수원·화성'에서 만난 정조, 그의 효심은 원효 트레일 대장정의 끝이 아니라 또다시 찾아나서야 할 '행복'이었다.

▲ 정조어진

■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결정체, 용주사

개발 찬반 논쟁으로 세간을 시끄럽게 한 화성 태안지구로 들어간 취재진은 우선 용주사로 올라갔다. 경내를 가로질러 효행박물관 앞에 이르자 전국 사찰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길을 따라 전시돼 있다.

때마침 용주사는 해마다 열어온 승무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시인 조지훈이 용주사에서 머물며 지은 시가 바로 '승무'다. 용주사는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는 등 스님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효를 몸소 행하고 있다.

용주사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옮겨 모시고 명복을 빌기 위해 왕실의 원찰로 세운 절이다.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창건됐다가 병자호란때 소실된 후 폐사됐던 용주사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며 다시 일으켰다.

보경스님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에 감화된 정조대왕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양주에 있던 묘를 이곳 화산으로 옮겨 능을 수호하고 명복을 빌었다 한다.

정조는 임금의 지위를 상징하는 '용'자를 써 임금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를 위로했고, 궁궐의 형식을 따라 절을 지었다. 그래서 화성 용주사는 지금까지도 '효심의 본찰'로 여겨진다.

불교는 조선 임금의 간절함을 넉넉히 품어 지금까지 그들 부자를 따뜻이 지켜주고 있다. 설총이 돌아가신 아버지 원효 상을 빚어 인사하니 그 상이 설총을 돌아보았다는 설화가 떠오른다. 간절한 효심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신라시대와 조선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원효의 깊고 넓은 공덕이 아직도 중생들의 마음에 전해지는 모양이다.

▲ 건릉=효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조선 22대 정조(正祖)와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의 합장릉이다.

■ 부모와 영원히 함께 한 정조, 화성 융·건릉

화성 융·건릉은 가을에 걷기에 최적이다.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면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융·건릉(隆健陵)을 만날 수 있다. 날씨가 따사롭지만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더없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융건릉은 정조 효심의 결정체다.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건릉은 장조(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로 알려진 그의 비 헌경의왕후를 합장한 융릉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수은묘로 있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고 난뒤 묘를 영우원으로 높였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 붙였고, 후에 융릉으로 명칭이 격상됐다. 이후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스스로가 그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건릉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지난 1800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이에 그의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됐고, 21년 후에 승의하자 정조의 능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됐다.

발길을 고쳐 다시 빠져 나오며 되돌아본 융건릉은 아름답기만 하다. 정조의 효심이 나의 어리석음을 탓한다. '부모를 모시고 있을 때 더욱 정성껏 모시라고, 더 늦으면 후회할 거라고…'. 현재 사람들은 효의 정신을 이어 받기 위해 각종 축제를 계획하고, 인근에 효박물관을 짓겠다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룬 게 아무 것도 없다. 부끄러움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 용주사전경=서기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세워졌다 소실된 길양사 자리에 조선 정조가 부친의 명복을 빌기위해 세운 사찰이다. 사도세자 장조의 원찰로 절의 구조도 궁궐의 형식을 따랐으며 지금까지 효심의 본찰로 명맥을 잇고 있다.

■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행궁

수원 구시가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팔달산 자락 화성행궁 앞 광장으로 갔다. 우연히 그 앞에서 만난 학생들은 행궁을 바라보며 새로운 꿈을 꾼다. 새로운 나라를 꿈꿨던 정조의 꿈이 개혁정치로 피어나고 영글었던 곳이다. 정조의 효심이, 개혁의 꿈이 고스란이 전해지는 순간이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소에는 부사(府使) 또는 유수(留守)가 집무하던 곳으로 활용되던 곳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면에서 가장 크며, 성곽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외국 관광객이 자주 찾는 이곳은 해마다 10월이면 어김없이 정조 능행차 등 화성문화제가 열려 세인의 이목을 끈다. 인근 지동시장 등 재래시장에 들러 허기를 채우는 것도 큰 묘미다. 화성행궁 길 건너편에 있는 화성박물관을 지나 창룡문으로 향하면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성곽을 따라 걷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원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한 그들의 모습이 보기좋다.

긴 여정이 끝났다. 수원 화성행궁은 '원효 길'의 시작이자 끝이다. 우리는 원효의 길, 그 종착점에 도착했지만 누군가는 원효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곳이기도 하다.

대오각성한 원효가 신라로 돌아가 민중을 만났듯, 우리도 이젠 일상으로 돌아간다. 한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과 친구, 이웃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길에서 만난 원효'는 끊임없이 말을 건다. "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와 마주치라"고, 그리고 "길을 다시 떠나라"고 다그친다.

※ 인터뷰 / 용주사 주지 정호스님

"1만생 인연으로 맺어진 가족 아끼고 사랑해야"

"효(孝)란, 온라인상에서 용돈을 아버지·어머니 통장계좌로 이체, 송금하듯이 스스로가 공덕을 지어 부모님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용주사 주지 정호스님은 "불교의 윤회사상은 생이 끝나 죽음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며 "내가 지은 공덕 또한 윤회하듯 이생에서 전생으로, 나에게서 남으로 전해져 그 가치가 이어진다"며 이 같이 밝혔다.


정호스님은 "불교에서 가족은 8천~1만생의 인연이 중첩되면서 이뤄진 소중한 관계"라며 "이처럼 어려운 인연으로 맺어진 아버지·어머니를 위해 자식이 공덕을 쌓으면 돌아가신 후에라도 그 공덕이 전해져 부모님이 좋은 곳으로 가게된다"고 효 실천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또 "효는 인의예지신과 함께 유교의 대표적 사상으로 간주되지만 불교야말로 효를 으뜸의 가치로 여긴다"며 "불교의 효는 부모와 자식 관계가 과거 무수히 중첩된 인연으로 만난 사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그 인연의 깊이 만큼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윤회 속에서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르며, 스스로가 지은 업을 자식들의 공덕으로 해소,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수 있다"며 "효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끈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특히 정호스님은 "효는 건전한 가족문화를 유지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아파트문화와 핵가족화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자녀들이 성장과정에서 덕성을 이루지 못해 이해와 배려의 마음씨 훈련을 할 기회를 잃고 있다"며 "나와 남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현실 관계에서 체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훈련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정호스님은 마지막으로 "공덕을 쌓는 것은 참선이나 수행처럼 어려운 과정이 아니다"라고 전제한 뒤 "스스로 건강하고, 동기간에 우애하고 이웃에게 친절하며 사회에 공헌하는 것. 그 자체가 부모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효를 행한다는 것은 이생을 위해서나 다음 생을 위해서나 크 효용이 매우 큰 만큼 항상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사진┃조형기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