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서원
율곡 이이 기리기위해 1615년 세워
이후 학자 김장생·박세채도 모셔
한국전쟁때 파괴 1970년 새로 지어

파산서원
지역유생이 건립 현재 사당만 복원
성수침·백인걸등 위패 모시고 제사


파주시 법원읍에 위치한 자운서원(紫雲書院·경기도기념물 제45호)은 광해군 7년(1615)에 율곡 이이(李珥·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율곡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經世家)로,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했다. 법원읍 동문리 자운서원안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묘가 있다. 주변에 사임당 신씨의 묘(경기도기념물 제14호)를 비롯한 가족묘 13기가 있다.

율곡의 본관은 덕수, 판관 의석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 원수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율곡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은 세곳이다.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인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世居地, 조상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다.

그의 호 율곡은 율곡촌에서 유래된 것인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는 대단히 중요하다.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5대조인 강평공 명신이 1443년(세종 25)에 세운 뒤 증조부인 의석이 증축했다. 율곡이 어린시절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했던 곳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됐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율곡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였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 실시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을 제시,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자운서원은 효종 1년(1650)에 '자운'이란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을 임금으로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됐다. 숙종 39년(1713)에 율곡의 뒤를 이은 학자 김장생(1548~1631)과 박세채(1632~1695)를 추가로 모셨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됐다.

그 뒤 서원 터에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돼 빈터에 묘정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7호)만 남아있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 지원을 받아 새로 지은 것이다. 최근에 사당 전면에 강당과 동재, 서재 ,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했다.

사당안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다. 매년 음력 8월 중정(中丁, 음력으로 그달의 두번째 정일(丁日)을 이르는말)에 제향을 올려왔으며 최근에는 가을에 열리는 율곡문화제 행사때 제향을 지낸다.

자운서원내 내삼문 바깥 왼쪽에 세워진 묘정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는 자운서원의 건립 내력을 적은 비다. 1683년(숙종 9)에 세워졌다. 또 자운서원 왼쪽 산기슭에는 율곡의 일대기를 적은 이이 선생 신도비(향토유적 제6호)가 세워져 있다. 이이가 세상을 떠난지 47년이 지난 1631년(인조9) 4월에 세워졌다.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에는 파산서원(坡山書院·경기도문화재 자료 제10호)이 있다. 조선중기 학자인 청송 성수침(1493~1563)과 그의 아들 우계 성혼(1535~1598), 형제 절효공 성수종(1495~1533) 및 휴암 백인걸(1497~1579)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휴암 백인걸의 본관은 수원이며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에서 태어났다. 이이, 성혼 등 당대의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했다.

파산서원은 조선 선조 원년(1568)에 율곡 이이 등 파주지역 유생들이 세웠고 효종 원년(1650)에 나라에서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건물은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후에 복구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불탔다.

1966년 서원의 사당만을 복원했다. 사당 주위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정면 가운데에 솟을삼문을 뒀다. 건물의 주춧돌과 기단석 등은 처음 건물을 세울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았던 전국 47개 서원중 하나다. 파산서원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글=김신태기자
/ 사진=조형기 프리랜서